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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 6) 도호의숙 훈장 한운석 한운석(韓雲錫, 1884-1950)도 만세운동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다. 한운석은 홍성군 결성 출신으로, 주소지는 대호지면 조금리 364번지 로 되어 있다. 1919년 당시 조금리에 거주하면서 도호의숙과 반곡서당의 훈장으로 강학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4월 3일 밤 면사무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글을 짓고「애국가」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해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 등 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 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 장을 추서하였다. 한운석은 옥고를 치른 후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로 이주하였다. 수당리는 함평 정씨 집성촌으로, 존재 유진하의 제자인 정재학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정재학이 기축년(1949) 3월에 죽자 한운석은 그를 위해 아래와 같은 만사를 지었다. 39) 슬프다 그대 박학이 일찍이 꺼리낄 것이 없었는데 / 嗟君博學早無方 책을 지니고 갑자기 하루밤 서리에 시들었네 / 書帶旋凋一夜霜 시엽( 葉)의 제시(題詩)를 다시 볼 수 없고 / 葉題詩無復覩 자고새 목뼈 울움 우는 소리 평탄치 않구나 / 鳴咽不平嗚 사문의 죽음이여 고향은 멀고 / 斯文喪矣家鄕遠 극락이 편하다 하나 길이 멀도다 / 極樂安之道路長 이곳 수당에 살았지만 수역(壽域)이 아니었고 / 居此壽堂非壽域 신선과 함께 요경(瑤京)에 올라 갔네 / 神仙共伴上瑤京 (번역: 南松 蔡奎鮮) 39) 정재학, 『方齋文集』권3, 輓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