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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 리로 이거했으며 1946년 1월,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에서 작고하였다. 정 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대호지 4·4운동은 사성리의 남병사댁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남계 창과 남주원의 활동은 중심이 되었다. 남주원의 조부인 남명선 (1846~1916)은 생부인 남정윤(南正倫)이 군수를 지낸 덕분에 어릴 때부터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진사 이봉회(李鳳會)의 문하에서 수학하였 다. 가세가 점차 기운 때문에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혔으며, 1864년에 증 광 무과에 급제하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심에 곧바로 관직에 나아가 지 않고 후에 출사하여 많은 내외직을 역임하다가 종2품 한성부 우윤, 장 위영 병방 경무사를 지냈다. 남명선이 고위직을 지냄으로 재산도 크게 형 성된 것으로 보인다. 남명선의 가계는 좀 복잡한 편이다. 원래는 충장공 남 이흥의 4자 두추(杜樞)의 자손들이다. 그런데 남이흥의 증조인 남세건(南 世健)의 바로 위형인 세칙(世則)의 증손인 이길(以吉)이 자손이 없어 두추 가 출계한 것이다. 그리하여 시조인 남군보(南君甫)의 7세손인 충간공(忠 簡公) 지(智)의 제2자 부정공(副正公) 칭( )의 후손에 속하게 되어 이들을 남주원 애국지사 남주원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