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page

| 161 4) 남주원과 남계창 남주원(南柱元, 1893-1947)은 사성리에서 출생하여 1899년 2월부터 1905년 1월까지 6년간 도호의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서울로 올라간 그는 중동학교와 호동 사립해동신숙을 마쳤다. 그가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에 조부 남명선이 작고하였다. 1916년 12월에는 도호의숙의 분교격인 반곡학당을 자신의 집에 설립하였으며 1916년에는 도호의숙의 분교격인 반곡서당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이즈음 대호지 포구를 이용하 여 서울을 왕래할 때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던 한용운, 김좌진 등과 교분을 쌓았다 한다. 그는 1919년 3월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탑골 공원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귀향한 후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4 월 4일 대호지면사무소 앞에서 면장의 연설에 이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주민들에게 술을 대접하여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1천여 명의 대호지 면민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남주원은 천의 시 장에 도착하여 이대하·한운석·남상락 등과 함께 시장에 모인 군중들에 게 연설을 하였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시위하 였으며, 일제 순사의 발포에 천의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는 한편 일본인 순사와 순사보 등을 구타하였다. 그는 4월 23일 자택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서산경찰서에 구금되고 5월 13일 검 사 기소되어 공주형무소에 이감된 뒤 9월 8일 예심이 종결되어 9월 10일 송치되었다. 10월 25일 징역 1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는 옥고를 치른 후인 1920년 10월 23일 출감하였다. 남주원은 이후 방황의 시련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1921년 9월에 사성리의 대지 2,433평을 처남인 오정근에 게 매도 정리하게 하였다. 이후 식솔들이 분산하게 되었고 1922년 4월에 는 서울 예지동으로 이거하였다. 이어 죽림동으로, 또 1926년 3월에는 경 기도 시흥군 남면 당정리로 이거하였다. 그의 이동은 계속되었는데 1927 년 6월에는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로, 1935년 8월에는 서산군 부석면 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