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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 機)의 10세손으로 1868년 6월 3일, 대호지면 도이리 213번지에서 출생하 였다. 12살 즈음인 1880년경 도호의숙에 입숙하여 11년간 한학을 수학하 였으며, 그 후 1892년부터 1898년까지는 도호의숙에서 유년부와 성인부 를 강학하였다. 남성희 역시 3월 1일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여하였다가 3· 1운동을 목도하고 내려와 51세의 고령으로 대호지 4·4만세운동에 참여 하였다. 그는 4월 6일 홍성수비대에 체포되어 4월 24일 보안법 위반으로 서산경찰서에서 태형 90도의 체형을 받고 허리와 우측 다리를 크게 다친 상태에서 출감하였다. 그 후 옥중의 여독으로 1941년 73세를 일기로 작고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남성희의 훈육을 받은 큰아들 남상학(南相學)은 1890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남씨 종숙인 도호의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이어 1901년에는 11세 의 나이로 유년부를 맡아 훈학을 하였다. 또한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 고 키가 9척 장신이며 무관형으로 인근의 사성리 반곡에 거주하는 남명선 한성우윤의 총애를 받아 재산관리 서사를 지냈다. 서울을 오갈 때 반곡 남 명선 댁에 유숙하던 김좌진과 교분이 있어 1918년 28세에 길림에 도착, 북 로군정서군 사령관인 김좌진 휘하에서 사관양성소를 설립하는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20년 30세에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생사 불명 되었다. 유족들은 1965년에 추정 사망 신고를 하였고 동시에 배위 전주 이 씨와 같이 의대 합장하였으며 묘소는 대호지면 도이리 말우리에 있다. 둘째 아들 남상은(南相殷, 1894-1974, 호: 翠松)은 도호의숙에서 수학한 뒤 1919년 26세로 4·4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여 천 의시장에서 시위할 때에 행동대장으로 시위 군중을 지휘하였다고 한다. 그 로 인하여 5월 31일 보안법위반 및 소요죄로 구류되었다. 6월 17일에는 검 사에 의해 기소되고 9월 8일 예심이 종결되었으며 9월 10일 공판 송치되 어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되었다. 이후 경성 복심 법원에 항소하였고 12월 25일 징역 8월형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왜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