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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 남정은 해방 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부 고문을 맡고 있다가 1948년 대한민국 총노동원본부 소속으로 초대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으나 무소속 이며 천도교 장로인 이종린에 이어 차점으로 낙선되었다. 그 후 1950년 6·25동란 당시인 7월 20일, 공산당의 만행으로 정미면 승산리에서 희생 되었다. 당시의 정황에 대하여 다음의 증언이 있다. 어느 날, 죽창을 맨 청년 수십 명이 새벽녘에 이르러 집을 에워싸더니 극재선생을 연행해 갔고 이에 뱃말로 건너가 독립투사 남정선생을 연행해 갔다. 연행된 지사들은 분주소 유치장에 갇혔고, 그 때에 나는 날마다 식 사를 날라야 했다. 며칠 후 백부이신 상집씨도 수감이 됐고 극재선생, 남 정선생, 남흥열선생 등은 천의로 이감을 했다. 거기서 남정선생은 구타를 당하여 옥사를 했고…… (남균우씨의 회고담)『극재유고』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86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 8월에는 건 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가 1919년 당시 대호지 만세운동에 참여 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남정의 행적은 문중의 사람들이나 동리의 사람들 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2) 남상돈 남상락 남상찬 3형제 의령 남씨 문중에서는 많은 이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는 데, 그 중 주목할 인물로 낙동파인 남택희의 아들인 남상돈(南相敦)·남상 락(南相洛)·남상찬(南相瓚) 3형제를 들 수 있다. 이들 모두 만세운동에 참 여하였으나, 남상찬은 체포를 면하여 형을 받지는 않았다. 낙동파(樂洞派) 란 도이리 낙동에 살던 남보영(南普永)의 다섯 아들을 말한다. 남보영은 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