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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 이다. 남이흥의 장남인 두극(斗極)이 그의 8대 조이다. 두극은 용안 현감에 의풍군(宜豊君)을 제수받았다.면천군수를 지냈으며, 양세충신 애국충절 가 문에서 성장했다. 이러한 곧은 가풍 속에서 자란 남정의 소년기 시절에 관 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남정은 호가 화산(華山)인데 이는 그가 거주하던 곳의 도이리의 산 이름 이기도 하다. 그는 14세 때인 1894년에 한문훈장으로 서산시 지곡면 화천 2리 벌덤집이라 불리던 이찬의 집에서 당시 7세이던 이찬의를 비롯하여 몇 명을 가르쳤는데 그 기간은 대략 5년 정도였다 한다. 당시 14세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학식이었다고 한다. 남정이 이곳에 왜 왔는지 그 이 유는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도 이찬의 선대께서 도이섬 남씨와 사돈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평소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종린도 당시 이 곳에서 살았는데 이종린은 1883년생이니 남정보다는 3살이 어렸다. 이종 린의 고향이 화천리 샘골이다. 벌덤집과는 가운데 산이 있어 돌아다녔으나 직선거리로 본다면 500~600m 정도로 추정된다. 결국 어린 시절부터 교 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후일 제헌선거에서 경쟁하는 라이벌이었다 한다. 남정은 26세인 1906년에 정산창의소에 나가 홍주의병 소모장으로 활동 하였다 한다. 1908년에는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여 의병전쟁으로 확산되었는데 당시 전라도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고, 1909년에는 대종교 대법사로 활동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그는 1920년에는 회덕현과 장춘현 일대에서 편강렬 등과 함께 의성단을 조직하여 양기탁과 함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의성단에서 그는 장춘의 일본영사관과 심양의 만철병원을 습격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또한 길림성 주하현, 백파 등지에서 논을 개척하여 재만 동포들의 민생문 제 해결과 독립군의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조직한 만주흥업조의 총재를 지 냈다. 단장인 편강렬이 체포된 후 1924년 의성단이 정의부에 흡수되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