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page

142 | 그 후 김교남 면장이 1971년 3월 4일에 이르러 100여명이 3·1 운동 선 열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72년 1월 15일에는『대호지 기 미독립운동약사』를 발간하였다. 이 책은 당시에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생존 자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정리한 최초의 대호지 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라 하겠다. 그리고 1972년 3월 4일, 생존자인 남상은을 중심으로 순국선열 영세추모비를 제막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300여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 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는데 당일 참석한 예비군을 동원하여 송봉운의 유해 를 이장하게 되었다. 그 이후 매년 3·1절 기념행사로 이어져 왔다. 1982년 4월 8일, 드디어 남만우가 부산형무소에서 1919년도의 경성복심 법원『보안법위반사건 형사공소사건 재판 원본안』(판결문)을 발굴하였다. 판결문의 분량은 144쪽에 달하였고 주요한 내용은 공주지방법원에서의 판 결에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항소를 제기한 34명에 관한 것이다. 이로 써 그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만세운동의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1986 년 6월 22일에는 대호지면장 정성환 명의로 만세운동과 관련한 수형인조 서 명단이 발표되었다. 1989년 3월 간행된『대호지면지』에도 대호지 만세 운동에 대한 내용이 실리게 되었다. 1990년 3월에는 이범일과 남기호가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에 내려가 1919년도 공주지방검찰청『형사사건 부』를 입수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옥사한 3명인 김도일, 박경옥, 이달준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일부 누락된 사람도 새롭게 발견되었다. 옥사한 3명에 관한 사실은 남상은의 생존시 증언에 의하여 알려졌었다. 공주형무소에서 남상은을 배석시켜 이들 3명이 고문에 의함이 아닌 병사임을 3회에 걸쳐 강요하였다고 한다. 1990년 3월 30일에는‘대호지 독립만세운동 선열추모사업 추진위원회’ 가 발족(초대 회장 : 정성환)되었다. 1989년 4월 4일부터는 제1회 대호지 독립만세운동 선열추모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처음으로 4월 4일이라는 역사적인 대호지 만세운동일을 기하여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면 단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