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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대호지면은 북쪽으로는 바다를 향해 있고, 동쪽과 서쪽 양면이 리아스식 해안의 좁고 깊은 만이 동과 서를 격리시키고 있다. 이처럼 대호지 지역은 해상 교통이 발달된 반면에, 육상 교통로는 동남 쪽으로 가는 정미면 만이 열려 있는 폐쇄된 곳이다. 이에 따라 대호지 주민들은 정미면 천의 시장에 열리는 5일장을 이용하였으니, 1919년 4월 4일 대호지 주민들이 정미면 천의 시장으로 행진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도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과 연관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대호지면에는 면사무소가 있었을 뿐 경찰 주재소는 정미면 천의리에 있었다. 대호지 면민들이 만세운동을 정미면 천 의리에서 벌이게 된 데에는 이러한 까닭이 있었다. 서산군에 속해 있던 대호지면은 해방 후인 1957년 11월에 법률 제456호 에 의해 당진군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75년부터 9년간의 공사를 거쳐 1984년에 대호방조제를 준공하였다. 이로써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와 당진 군 석문면 교로리가 연결되었다. 대호방조제는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삼길 포에서 당진군 석문면 도비도까지 3,253m의 1호 방조제와 석문면 도비도 에서 석문면 교로리까지 4,554m의 2호 방조제를 합해 제방 길이 7,807m, 제방 높이 30.5m의 석괴·토사 혼성형 방조제이다. 대호방조제 를 건설함에 따라 개발된 총면적은 77㎢이고, 수혜 면적은 7,419㏊이며 저수량 1억 2200만 톤 규모의 담수호와 농경지 37㎢가 생겨났으며 연간 5 만 1198M/T의 식량을 증산하게 되었다. 또한 양수장 7개소와 용수로 238 ㎞도 조성되었다. 2011년 현재 대호지면의 인구는 1,301세대에 2,887명에 달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100년 전의 인구 보다도 적은 숫자이다. 서산군수 였던 이민 영(李敏寧)이 쓴『서산군지(瑞山郡誌)』에 의하면, 1914년 현재 대호지면은 약 65.75㎢의 면적으로, 849호에 총 4,657명(남자 2,402명, 여자 2,255 명)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도 3가구에 11명이 거주하고 있었 던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