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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 그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생식기능이 마비되어 절손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이다. 당시 감옥 생활보다 더 무서운 것이 태형(笞刑)이었다고 한다. 태형 을 받은 사람을 보면 피부가 전부 벗겨지고 살이 노출되며 종기가 일어나 고 많은 사람들이 이 태형으로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일본 수비대와 경찰의 무력적 탄압은 이를 목격한 어린 학생의 증언을 통 해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천의에서 태어난 장정환은 서당에 갔다 오다가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에 의해 시위자들에게 일경이 태형을 가하는 현장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천의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나는 10살이었다. 내 집은 천의에 있 었고 나는 천의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서당에 다니고 있었다. 훈장님께서 난리가 났다고 집에 늦게 가라고 하셨다. 그 날은 어둑어둑해지면서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서당에 가는 길에 언덕 위에서 천의 시장에서 일어 나는 일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일본 경찰과 많은 주민들, 그리고 경찰을 싣고 온 차였다. 차는 요즘의 봉고차와 같이 생겼는데 아주 작은 편이었 다. 그리고 일본 경찰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묶어서 시장 바닥에 늘여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엎어놓고 마구 팼다. 얼 마나 팼는지 걷는 사람이 없었다. 매를 맞은 사람들은 기어서 화장실로 갔 다. 천의 시장 외곽에는 요즘의 간이 화장실과 같이 짚으로 대충 엮어 지 붕을 한 화장실이 몇 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변기에 고인 물을 퍼먹었 다. 장독에 걸리지 않으려면 이것을 먹어야 한다고 나도 들었다 (2004년 증언, 김남석의 위 논문 참고). 대호지면 독립만세운동 관련자 중 경미한 이들에게는 태형으로 즉결 처 분을 한 것이다. 그중 52명이 공주지방법원에 기소되어 1919년 10월 24일 다음과 같이 판결 선고가 있었는데, 공주지방법원의 판결 내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