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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 충청남도 서산군내 각 1개소 2백 내지 8백 명의 폭민이 내습하여 헌병 에 의해 진압되었다. 폭민 사망 1, 부상 약간 명이 나왔다. 29) 라고 시위대에 대한 탄압의 실상을 보고하였다. 시위 참여자들은 일제 수비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산골, 또는 바 다를 건너 당진, 고대 등지로 피했다. 어떤 이들은 머슴으로 변신하여 몸을 숨겼다. 그 즈음 광목 장사들이 각 가정을 돌며 포목을 팔고 다녔다고 한 다. 이들은 가정을 돌며 부녀자를 구타하고 주인의 행방을 탐색하였던 것 인데 이들이 바로 일제 헌병 경찰 혹은 염탐꾼들로서, 변장을 하고 다니며 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을 잡아갔던 것이다. 원순봉도 만세시위 한 달여 뒤 광목장사로 변장한 순사에 의해 붙잡혀 옥고를 치른 것이다. 일제의 탄압으로 200명에 가까운 대호지 주민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잡 혀온 이들에 대한 모진 고문을 가하였는데 대호지 주민들이 당한 고문으로 는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기,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 물 먹이기, 사지 뒤 틀기, 전기고문, 손가락 사이에 막대를 넣고 틀기, 쇠가죽 매, 잠 안 재우 기, 흑두형 등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흑두형이라는 고문이 가장 악랄 한 고문이었다고 전하여진다. 흑두형은 피의자를 옷을 발가벗겨 의자에 앉 히고 양팔과 다리를 뒤로 젖혀 꽁꽁 묶은 다음 눈을 가리고, 특수 종이를 길게 말아 심지를 만들어 생식기에 꽂은 다음 심지 끝에 불을 붙이면 마치 다이나마이트 선에 붙인 불처럼 불이 타 들어가 온 몸이 저리고 아프며 전 율하게 되는데 그 통증은 항우장사도 못 견딜 만큼 무서운 형벌이라는 설 명이다. 후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당시 전 세계의 언론들이 3·1운동을 취 재코자 국내에 모여들자 이를 의식한 일본 관헌들이 자신들의 야만적인 고 문으로 인한 외상 피해자가 속출함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그런데 28) 강덕상,『현대사 자료 25, 26-삼일운동편-』1, みすす書房, 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