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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 찰관과 보병에 폭행을 하여 발포하여 그들의 사상자가 각 1명을 내고 해 산하였다. 동군 조금리 8일 오후 7시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약 70여 명의 폭민이 폭행하여 경 찰관과 보병이 협력하여 발포하여 해산시켰는데, 그들의 사상자가 각 1명 이 나왔다. 28) 3) 일제의 탄압 홍성에 주둔하였던 수비대 1개 소대가 서산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천의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아 4월 4일 당일에 출동하였다. 이들이 당시 서산 군 정미면 대운산리에 이르렀을 때 서산-당진 도로에서 천의로 들어오는 대운산리의 대운산교가 무너져 있어서 차량통행이 불가능했다. 이에 수비 대는 대운산리의 구장인 이연종에게 동민을 이끌고 보수를 명하였다. 이연 종 구장은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서두는 수비대를 보고 시위 운동자들이 피신할 수 있는 시간을 벌도록 작업을 지연시켰다. 이 때문에 교량 복구에 시간이 걸려 수비대는 천의를 거쳐 이튿날인 4월 5일 새벽이 되어서야 대 호지에 도착하였다. 헌병대가 대호지면사무소가 있던 조금리에 도착하였을 때 송봉운(宋逢 云, 28세)은 10년 만에 푸른 하늘 아래 태극기가 휘날리고, 조선독립만세 를 소리 높이 외쳤던 감격을 가라앉히지 못하여 대호지면사무소 앞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수비대가“넌 왠 놈이냐?”하고 묻자, 송봉운은“나는 대한의 청년이다.” 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일제 수비대들은 이리떼처럼 송봉운에게 달려들 28) 강덕상,『현대사 자료 25, 26-삼일운동편-』1, みすす書房, 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