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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 서도 일제의 발포로 사망 1명, 부상 1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이들의 독립만 세시위가 완강하였음은 만세운동을‘폭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산위에서 투석 등으로 일제 관헌들에 대해 치열한 공방전 을 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밤 10시 정미면의 대호지면 반대편인 수당리 에서 300명의 마을 주민이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대호지 시 위운동이 정미면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제는 경관 4명, 보병 2명을 급파하여 총기를 난사하며 저지하였다. 이로 인해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관한 4월 10일자 일제 조선헌병대 사령관이 일본 육 군대신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8일 충남 서산군 정미면 수당리에서 300의 폭민봉기, 경관 4, 보병 2, 급행발포 사 1, 서산군 대호지면에 불온, 경관 6, 보병 2 출동 송전리에서 20 폭행 발포 사상 2,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70 폭동, 발포 사 1, 상 1, 아 의 피해없이 (후략)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3·1운동 일차보고에 이 부분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 로 나온다. 이를 보면 왜 일본 군경이 야간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즉, 일본 군경에 대해 대호지 주민들은 투석 등으로 적극 항거했기 때문이었다. 서산군 수당리 8일 오후 10시 약 3백 명의 폭민이 정미면 수당리에서 봉화를 올리고 출장 경무 중이던 경찰관과 보병에 대하여 투석 기타 폭행 을 함으로 발포하여 해산하였다. 폭민에 사망자 1명이 나왔다. 동군 송전리 8일 오후 6시 대호지면 송전리에서 20여 명의 폭민이 경무 중이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