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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 축이 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곧 수비대가 들이 닥쳤다. 홍성 수비대가 출동 하자마자 만세운동 자금 후원자 중 한 명인 홍순국은 미리 준비해 둔 배를 타고 난지도로 떠났다. 그리고 그 곳에서 머슴을 사는 등 모진 고초를 겪다 가 다시 인천으로 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정미소에서 일하였다고 한다. 그 부인은 왜경이 와서 남편의 행방을 대라고 총으로 마구 쳐서 좌골이 상 하였고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았다고 한다. 4월 4일 대호지 면민들의 천의장터 원정 시위운동이 있고 난 그날 밤 면 천 8개 마을, 순성 10개 마을, 당진 읍민이 산위에 올라가 봉화시위를 하 였다. 이튿날인 4월 5일 당진군 송악면의 면 소재지가 있는 틀무시(기지시 리)에서는 수백 명의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하였는데 여자 1 명을 포함한 주동 인물 4명이 체포되었다. 4월 8일에는 인접한 서산군 성 연면 갈현리에서 김옥제(金玉濟)·이종옥(李鐘玉)·남명숙(南明淑)이 주동 이 되어 성왕산에 올라 만세 시위를 하였다. 같은 날 서산군 운산면 수평 리에서는 주민 300여명이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하였으며 역시 그 날 밤 용현리에서는 주민 50여명이 동리의 보현산을 중심으로 횃불 시위 를 하였다. 4월 4일의 천의장터 시위가 있은 후 송전리의 민재봉 집에서 재거사를 위한 논의에서 다음 거사일을 4월 8일로 정한 바 있었다. 일본 수비대는 대호지면 일대에서 주동자 색출에 광분하고 있을 때였다. 4월 8일 오후 6 시 대호지면 송전리에서 뒷산에서 봉화가 솟아올랐다. 수십 명이 산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림으로써 독립운동의 공간을 장터에서 산상까지 확장시 켰으며, 낮의 시위를 밤에까지 연장하는 시위운동으로 이어갔다. 7시경에 조금리에서 봉화가 솟아 올랐다. 조금리에서는 70여명이 산에 올라 봉화 를 올렸다. 주동자 색출에 광분하던 일본 수비대와 순사대는 경관 6명, 보병 2명이 출동하여 총기를 난사하여 송전리에서 2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조금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