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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 일제 당국은 대호지 주민들의 독립만세 시위에 당황하고, 21명의 주도자 를 체포했음에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천의 주재소를 폐쇄하고 인근 지역 일본인 14명을 서산으로 철수시켰다. 서산군 천의, 천의경찰관주재소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순사보 2명 중 1명 은 무사한 것으로 판명되나 다른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당시 응원대의 활 동에 의해 수모자 이하 21명을 체포하였으나 오히려 불온한 징조가 있기 때문에 재류하는 일본인 14명이 서산으로 철수하고 또 동 주재소는 인원 보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일시 폐쇄되었다. 27) 4월 4일의 날이 어두워졌다. 일경들은 도망치고 주재소는 완전 파괴되었 으며 다지리의 무기도 탈취되었다. 시위 군중은 만세를 부르고 다음의 거 사 연락이 있을 때까지 일단 귀가하기로 하였다. 탈취한 무기는 사성리의 이대하 집에 모았고 송재만은 이를 대호지의 가 장 오지라고 하는 적서리의 한적한 숲속에 숨겨 두었다. 송재만은 이어서 사성리에 돌아와 남주원과 만나고 이어서 다시 남세원의 자전거를 빌려 타 고 송전리로 갔다. (2) 2차 시위 계획과 횃불 시위 4월 4일 밤, 거사의 주동자들은 송전리의 민재봉의 집에 모여 제2차 만세 운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후 몇 번의 모의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천도교의 중심인물이며 이 지역의 책임자인 백남덕, 백남주 형제는 친상 때문에 1차 만세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제2차 운동계획에 적 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송전리에는 천도교 교도가 많아 천도교 신자들이 주 27) 국회도서관, 「3·1운동편 3」, 『한국민족운동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