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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 남기원·김장안·원순봉이 맡았다고 한다. 행동에 나선 송재만 등은 4월 2일 면사무소 직원인 김동운·강태원 등과 협의하여 도로와 나무의 정리 작업을 한다고 하고「도로수선병목정리의 건」이라는 공문을 만들었다. 이들은 공문 위에 면장의 직인을 찍어 주민들 이 4월 4일 아침 도로보수 작업을 위해 나오도록 하였다. 4월 3일 송재만은 당시 구장들이었던 출포리 임용규, 송전리 민두훈, 도 이리 남상현, 사성리 박희택, 적서리 차영열, 두산리(구장 대리) 김홍록, 장정리 정원우, 마중리 남상익의 집으로 찾아가 도로 보수를 위한 공문을 전달하며 마을 주민들에게 이를 전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날 밤 송재만은 면사무소에서 한운석(韓雲錫)에게 만세운동의 취지를 말하고, “모든 군중 에게 나누어 줄 애국가가 될 만한 문건의 필요성”을 말하며 애국가를 만들 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한운석은 당시 도호의숙과 남주원의 반곡서당 훈장 을 겸하고 있었다. 그리고 송재만과는 조금리 364번지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한운석은 송재만이 설명하는 운동의 취지에 찬동하고 애국가의 작 사와 인쇄의 일부를 담당하기로 하고, 그날 면사무소에서 간교한 일본은 강제로 합방을 주장해 드디어 내 나라를 약탈했다. 우리 들은 이러한 통탄할 지경에 이르니 살아서는 설 곳이 없고, 죽어서는 묻힐 땅도 없다. 이 원수를 갚지 않고 어찌하랴! 각인은 동심일체 힘을 다하여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아 무궁전세의 내 국가를 독립하자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라는 취지의 애국가를 썼다. 한운석이 작성한 애국가는 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구전되어 오던 가사는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