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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지 만세운동의 중심 인물 중에는 천도교 인물이 있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이곳 천도교가 단순히 주민동원에 편승되어 움직였다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하겠다. 2) 만세운동의 전개 (1) 천의시장에서의 시위 추진위원회 위원들은 4월 4일(음력 3월 4일)을 기해 천의시장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정하였다. 대호지면에는 장이 서지 않고, 면 사무소 이외에 경찰과 주재소도 없었으므로 동남 쪽으로 약 5-6km 떨어 진 인접한 정미면 천의장을 택했으며, 장날인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한 것은 다른 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날에 나온 주민을 참여시켜 만세운 동을 전개하기 위한 의도였다. 정미면 천의리에 있던 천의장은 인근의 정 미면, 대호지면, 고대면의 주민이 모이는 곳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 한 최적의 장소였다. 당시 천의장은 4일과 9일에 시장이 열렸는데 대호지 면의 동쪽 지금의 온동수로 끝에‘똑데기터’라고도 불리우는 포구와 더불 어 큰 시장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일과 후 젊은 층은 도이리의 도호의숙과 사성리의 남주원의 집에 서, 중년 이상은 현 도이리 충장사 옆에 있었던 남상집(南相集, 징역 8월) 의 집에 주로 모였으며, 또한 송전리의 민재봉(閔載鳳)의 집에서도 모였다. 이들은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한 곳에서만 모임을 갖지 않고 자주 이곳저 곳 장소를 바꾸어 가며 모임을 하였다. 남기형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모 임이 있게 되면 할머니나 여인들이 먼 발치에서 일본인이나 일제의 정보원 인 마을 주민 등 수상한 사람이 오나 살폈다고 하며 집안의 종손들은 절대 로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집안의 멸절(滅絶)을 염려 한 때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