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page

120 | 위 인물 중에 1910년대 당진 천도교구에서 활동한 인물로 박기신·신 태순·이용의·장흥환·정환태·차동로 등이 확인된다. 신태순은 이후 천도교 중앙종리원 서무과 대표위원과 청년동맹 중앙부 대표 등을 지 냈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 당진지회를 창립하는 등 민족운동을 전개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자 송전리 출신으로 천도교도였던 백남덕(1871-1933)은 생질인 홍순덕과 김장안 등과 거사를 계획하고 최정 천·이동하·이달준·민재봉·남기원 등 천도교도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당진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들은 대 호지 면사무소 직원인 민재봉이 면장 등과 연결된 대호지에서의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함에 이에 합세하게 되었다. 이들 중 이달준은 백남덕의 천거로 천도교에 입도하여 대호지 4·4운동 에 행동 대원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19년 8월 순국하였다. 민재봉은 체포되어 징역 1년6월형, 김장안 (1886-1962)과 남기원, 그리고 최정천(1881-1950)은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주모자였던 백남덕은 4월 4일 친상을 당해 시위운동 에 참여할 수 없어 체포를 면했으며, 자금을 지원하기까지 했던 홍순덕 (1895-1940)은 난지도로 피신하여 왜경의 체포를 면했으며, 그 후 다시 인천으로 가서 일인이 경영하는 정미소에 일하면서 피신 활동을 했다고 한 다. 이들은 4·4운동 후에도 4월 10일 재거사를 모의했던 것으로 알려진 다. 이들이 옥중에서 순국하고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이 들의 활동은 과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이곳 당진에 천도교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천도교 종교기관이 나 관련 인물이 없어 그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제 시 대 천도교는 국내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었고 3?1운동의 중심 을 이루고 있었으며 당진 지역의 천도교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또한 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