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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 3·1운동시에는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발간 하였으며,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명으로 활동하여 옥고를 치렀다. 1936년 부터는 멸왜기도운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1898년에는 최시형마저 붙잡혀 순교한 뒤, 동학은 급격히 침체되었다. 손병희는 사태를 수습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관헌의 추적이 심하자 1901년 3월 일본으 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망명 중이던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국내의 교인들을 규합, 동학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국내 동학 세력의 민족저항 력이 약화되고, 급기야 1904년 8월 말부터 전국에 걸쳐 조직되기 시작한 진보회는 이용구(李容九)의 주도하에 송병준(宋秉畯)의 일진회(一進會)와 합하고 친일 단체화하였다. 이에 손병희는 교정일치론(敎政一致論)을 철회 하고 정치적 관심을 포기, 종교로서의 동학을 고수하는 방침으로 바꾸었 다. 이에 따라서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어 새로운 교단 조 직을 선포하였다. 당진 지역의 천도교 세력은 매우 강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진지 역의 천도교회는 1892년 10월 박용태(朴容台)를 비롯하여 김난수·차동 로·김제근·김현구·신태성 등이 동학에 입교한 것이 기원이 된다. 이들 중 박용태와 김현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시 당진 일대에서 활동한 인물 로 확인된다. 당진 지역 천도교는 1907년 7월경에 남면 토곡리에 전실(傳室)을 설립하 면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된 직후인 그해 9월에 천도교 본부에서 당진군에 전교사 2인을 임명하였고, 1911년 2 월에는 당진교구가 독자적으로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초대 교구장에는 이 용의(李龍儀)가 임명되었으며, 공선원(共宣員)은 박기신, 금융원은 신태순 이 선임되었다. 박기신은 1911년 4월에 전제원(典制員)으로도 임명되었다. 1912년 4월에는 김동후(金東厚)가 당진교구장에 선임되었으며 공선원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