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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 민혁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1894년 1월 고부민란을 시작으로 하여 반봉건 을 기치로 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군들은 비록 사상적으로 봉건 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신분제의 타파와 농민적 토지소 유를 지향하면서 자주적인 근대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충남지방의 동학지도자들이 남긴 글이 확인되지 않아 그들의 사상적 특 성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박인호와 박광호 등이 1892년 올린 복합상소 문에 의하면, 최제우가 밝힌 동학사상에 철저함을 볼 수 있다. 상소문에 의하면, 선사 최제우의 말에 이르기를“부자(夫子)의 도를 깨달으면 한 이치의 정한 것이요. 오직 내 의도로 말하면 대체로는 같으나 조금 다르니라”하였 으니 조금 다르다는 것은 별 것이 아니라 성경신(誠敬信) 삼단(三端)으로 공경스럽게 천지를 받들고 반드시 심고하면 한울님을 육신부모같이 섬기 는 일 일단의 도리이니 실로 선성의 발명치 못한 일을 신들의 선사께서 처음 창명한 종지입니다. 라 하여 성경신(誠敬信) 삼단을 공경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상소문 에서 대저 그 종지는 한울님 섬기기를 부모같이 하고 유불선 삼고 통일의 이 치를 겸한 고로 조금 다르다고 한 것인데 그 겸하여 있다는 원인을 상고 하면 머리 깎고 검은 옷 입고 걸어가며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 임금과 부 모를 등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선(佛禪) 두 교중의 자비와 수련을 서로 합한 이치이며 실로 공부자(孔夫子)의 광명정대한 도체를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