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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 고종의 인산을 참례하였던 인사들이 대호지에 돌아오자 이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들은 두 차례의 준비 모임 을 갖고‘독립운동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차로 남상락(南相洛)·이 춘응(李春應)·남상집(南相集)·남상돈(南相敦)·남상직(南相直)·남상은 (南相殷)·이대하(李大夏) 등이 모여 거사를 논의하고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2차로는 자인 군수를 지낸 바 있는 이인정(李寅正) 당시 대호지면장을 포함하여 민재봉(閔在鳳) 등 면 직원과 면사무소의 용 인(傭人) 송재만(宋在萬)·도호의숙 훈장 한운석(韓雲錫)·김홍균(金洪 均)·김홍진(金洪辰)·홍월성(洪月星)·남인우(南仁祐)·남창우(南昌祐)· 남태우(南泰祐) 등 37명의 동지를 더 규합하였다. 이인정(1859. 6. 19- 1934. 5. 10, 본관: 전주)은 통정대부 갑산 도호부사 이택연의 장남으로, 자인 현감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물러나 사성리 510번지 검드락 마을에서 살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호지면이 되면 서 초대 면장(1914. 4. 1-1919. 4. 4)으로 있었다. (2) 당진 천도교도의 참여 대호지 만세운동에 당진 지역의 천도교도가 다수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 민중들은 19세기 중엽부터 팽배하였던 민중의 위기 극복의 사상으로 써의 동학을 신봉하게 되었다. 동학은 1860년(哲宗 11) 4월, 경상도 경주 출신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24)가 창시하였다. 동학이란 이름 은 외래 사상을 대신하여 동쪽 나라인 조선의 학문, 조선의 종교를 주체적 으로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다. 몰락 양반인 부친 최옥(崔 )과 재가한 모친 한씨(韓氏) 사이에서 서자 의 신분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최제우는 20세 때부터 어 지러운 현실을 건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구도의 길에 나섰다. 그는 전 국을 유랑하며 수련을 거듭한 끝에 35세 때인 1860년 4월, 상제(上帝)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