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page

112 | 김복한이 어느 날 남상혁을 불러“너는 고향에 가서 어른들께 의거를 일 으키라는 연락을 하고, 그곳에서 일하라”고 지시하였다. 남상혁은 그날 밤으로 대호지로 와서 조부 남진희(南軫熙)와 사성리 발궐 의 남 병사 댁으로 가서 스승인 김복한의 뜻을 전했다. 남 병사 댁이란 대호 지 출신으로 조선말 무과 급제를 한 남명선의 집을 말한다. 남명선(1846- 1916)은 군수를 지낸 남정윤(南正倫)의 아들이다. 그 역시 1864년 증광무과 에 급제하여 한성부 부윤, 장위영 경무사까지 지냈다. 당시 남명선의 아들 인 남계창(1903-1920)과 조카 남주원(南柱元, 남명선의 둘째 아들 남계영 의 아들)이 살면서 지역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후일에 사성리에 있는 남명선의 신도비는 남주원의 요청으로 지산 김복한이 지은 바 있다. 남주원은 도호의숙에서 1899-1905년까지 6년간 수학하였고, 그후 서울 에서 사립 중동학교와 호동 사립 해동신숙을 졸업하고, 해미군 공립보통학 교 학무 위원을 지낸 바 있다. 남주원은 당시 대호지면에서 제일 큰 부자였 다고 한다. 실제로 토지대장을 보면 대지가 2,433평이다. 집이 백간은 넘 었을 것으로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1916년 12월에는 도호의숙 분교격인 반곡학당을 자신의 집에 설립하였다. 그의 집에는 대호지 포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식객으로 유숙 또는 출입하였는데, 이 포구를 이용하여 서울을 왕래하던 김좌진, 한용운 등과도 교유하고 있었다 한다. 이 지역에서는‘대호지 만세시위는 사성리 남 병사 댁에서 시작되었다’ 고 전해 오는데, 당시 문중 어른들이 남 병사 댁에 모여 망국의 한을 풀며 시국을 지켜보고 있던 중이었다. 바로 이때 김복한의 뜻이 전달되어 옴으 로써 이 지역 유림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 3일이 고종의 장례일로 발표되면서 지방의 유지 인사들이 황 제의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 때 대호지 지역의 유생들도 상 경하였다. 이 지역 광무황제의 인산 참례자에 관해서는 서술과 증언이 몇 가지로 달리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남계창의「서훈 신청 공적서」를 참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