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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 무공회(無空會)가 조직되었는데, 무공회에서 인력거조합을 모체로 하여 1927년 홍성노동조합을 조직했다. 연기군에서는 1927년 부강노동동맹위 원회가 결성되어 1929년 조치원역 인부의 동맹파업을 벌였다. 공주에서는 1926, 1927년 공주노동회와 공주노동협성회를 창립하고 각 면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서산군 해미에서도 1927년 10월 해미노동조합을 설립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합법적인 노동 운동이 어렵게 되었다. 때문에 노동운동은 비합법적인 지하활동이나 혁명 적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충남지역에서의 혁명 적 노동조합운동은 드러나지 않지만, 일제의 전시 물자 동원을 위한 군수 공장이나 금광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항쟁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충남지역 노동자들은 노동쟁의를 통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 신장하였고, 이를 통해 투쟁 역량과 항일의지를 배양하였다. 더욱이 사회주의의 수용과 사회 주의자들의 참여로 노동운동의 역량이 급격히 성장하였고, 이를 토대로 노 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민족 해방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실천하고자 하였다. 충남에서의 신간회운동 역시 활발히 전개되었다.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 를 두고 전국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 로 참여한 충남 지역의 인물로는 이상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상재는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초대회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이상재 외에도 충남인 발기인으로는 조병옥·이승복·최익환·신채호· 한용운·김명동 등이 포함되었다. 이승복은 창립시에 선전부장에 임명되 었다. 조병옥은 천안 출신으로 1925년 수양동맹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 며,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사정조사연구회를 결성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대강연회의 개최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최익환은 대동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1926년 9월 정우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정우회 선언을 통해 신간회 결성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신간회에서는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