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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 삽교면 용동리에서 마름의 횡포에 항의하여 쟁의가 있었다. 금산에서도 1923년 10월 추수기에 마름의 횡포로 농민항쟁이 일어났으며, 당진에서는 1924년 3월 면천 영화학교에서 5백여 명의 소작농민들이 모여 당진소작 조합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소작권의 영구 보장을 요구하였으며, 신평면의 지주 김영시를 상대로 한 쟁의투쟁을 벌였다. 이밖에도 1920년대 공주, 논 산, 조치원 등지에서도 농민단체를 조직하여 다양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 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여 혁명적 농 민조합운동, 이른바‘적색농민조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는 농민 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할 뿐 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적 지도 아래 토지혁명을 비롯한 민족혁명의 주요 과제를 해결함에 목표를 두었다. 따라 서 이 운동은 1920년대의 소작쟁의 운동의 방식과는 달리 소작료를 불납 하거나 고리대를 상환하지 않는 등 식민지 수탈경제체제에 도전하였다. 심 지어는 면사무소, 군청, 경찰서 등 통치기관과 수리조합, 산림조합, 농장 사무소 등 수탈기관을 습격, 파괴하는 등 혁명적인 투쟁을 펼쳤다. 1932년 5월에는 논산군 양촌면 지역에서 혁명적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머슴을 중 심으로 하는 70여명의 농민들이 적기(赤旗)를 들고 항의시위를 하였다. 부 여에서는 1933년 부여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유기섭 등에 의해 농민조합운 동 단체인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가 조직되었다. 여기에서는 야학을 개설 하고 연극 공연 등으로 농민의식 계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유기섭 을 비롯한 주도자들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30년 12월 아산에 서도 혁명농민조합이 만들어졌으나 주동자 송창섭 등이 이듬해 곧 검거되 고 말았다. 충남지역의 노동운동은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의 출범과 함께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20년 7월 예산에서 조선노동공제회의 예산지부의 개회식 이 있었다. 회원이 무려 3백여명에 달했다. 홍성지역에서는 1925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