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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 일어나고 이로 인해 금산보통학교 학생 전체가 동맹휴교를 한 경험을 축적 하여 시작되었다. 금산청년회에서는 독서회를 개최하여 민족적인 잡지를 윤독하고 문맹퇴치 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1939년에는 지원병제도를 거 부하였다. 학생들은 3ㆍ1운동을 경험한 후 독립운동의 주체로서의 역량이 성숙되 어 있었다. 학생들은 대내적으로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대외적 으로 일제의 침략과 억압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맹 휴와 함께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에 조직된 대전중학교의 선 우회(鮮友會)는 그 대표적인 단체이다. 선우회는 1926년 강제 해산되었으 나, 1928년부터 조선인학생회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권용두 등은 사회과학에 대한 학습과 토론을 벌였으며, 대전군시제사공장의 파업에 동 조하여 전단을 만들어 살포하는 등 동맹파업에 참여하였다. 예산농업학교 에서는 1932년 5월 강봉주와 정종호 등이 좌익협의회라는 단체를 조직하 였다. 이들은 1932년 6월 동맹휴학 투쟁에 참여하여 일부 학생들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공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1936년 3월 당시 2학년 학생인 김해인 등이‘명랑클럽’을 조직하고 일어사용금지, 신사참배거부, 일인교 유배척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충남지역에서의 농민운동은 소작쟁의, 농민야학, 적색농조운동 등이 있 다. 1920년부터 전개된 충남의 소작쟁의의 건수가 전국 13개도의 평균치 인 7.7%를 훨씬 상회함을 볼 수 있다. 특히 1930-1933년간은 28%를 차 지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작쟁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예산지역에서 특히 소작쟁의가 많았다. 예산군 오가면 면민들은 1923년 8월 예산공립보 통학교에서 면민대회를 개최하고 일제의 수리조합과 농장 설치를 반대하 였다. 면민들은 면장을 자갈밭으로 끌고 다니며 얼굴에 똥칠하는 등 과격 한 집단행동까지 하였다. 예산의 옥계리에서는 1924년 3월에 마름의 무리 한 소작권 이동으로 인해 쟁의가 일어났다. 예산에서는 1926년 2월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