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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 도 나타났다. 충남지역 3·1운동은 횃불 만세운동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 하다. 이 시위 양상은 3·1운동을 면과 리를 넘어서 군과 도를 연계하는 연합 만세운동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한편 김복한 등 충남지역의 유생들은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복 한은 세계 제1차대전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하고 있음을 전해 듣고, 과거 의병의 동지들과 연명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요구하 는 장서운동을 계획하였다. 김복한은 장서를 작성한 후 임한주를 비롯하여 의병의 동지였던 안병찬 등의 서명을 받았다. 김복한은 서명을 받은 후 제 자인 황일성 등을 서울로 보내 임경호와 협의하게 하였다. 이때 김창숙을 비롯한 영남 지역 유생들도 곽종석을 수반으로 하여 동일한 성격의 장서운 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전국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던 중에 임경호와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호서, 영남유림들의 뜻이 같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 에 따라 양 지역의 장서운동은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장서운동 은 일경에 탐지되었으며, 김복한 등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 충남지역에서 3·1운동이후 각성한 청년들은 1919년 말부터 지역별로 각종의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청년회가 내세운 목표는 품성의 향상과 지식 계발, 풍속개량, 사회의 계도 등을 들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민족의 자주 독립에 그 목적이 있었다. 조선청년회 청양지회에서는 1920년 12월 조선 청년연합회가 결성될 때 대표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1924년 4월 조선청년 연합회와 서울청년회 등이 서울에서 조선청년총동맹을 조직할 때는 홍성 청년회와 태안청년회가 총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청년운동은 1926 년의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그리고 1929년의 광주 학생운동과 긴밀 한 연계 하에 전개되었다. 금산에서 조직된 금산청년회는 광주학생운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