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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당진에서는 3월 11일 면천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대호지 면민들은 4월 4일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호지의 남상락ㆍ남상집 등은 면장인 이인정 등과 함께 천의장날인 4월 4일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대호 지면사무소에서 집결한 후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천의 시장을 향하여 행 진하였다. 천의에 도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서산과 당진경찰서의 경찰과 수비대까지 파견되어 시위대를 탄압하였으며, 대호 지면 조금리에서 송봉운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경의 검속은 1년 이 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수백 명의 주민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수형을 받아 이름이 밝혀진 이가 199명에 이른다. 이달준·박 경옥·김도일 등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서산지역에서의 3ㆍ1운동은 3월 16일 서산읍에서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3월 19일과 24일에는 해미에서, 3월 31일에는 팔봉면에서, 4월 5일에는 운산면의 고산리에서, 4월 8일에는 성연면과 음암면, 운산면의 용현리와 여미리, 4월 10일에는 운산면의 수평리와 갈산리에서 전개되었다. 청양 지역에서도 1919년 4월 초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청양 3ㆍ1운동 은 4월 5일 정산에서 시작되었다. 정산면 백곡리의 홍범섭(洪梵燮) 등은 4 월 5일 오후 3시에 정산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1백여 명의 장꾼들 과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 도 중에 정산향교 직원인 권흥규(權興圭)가 헌병의 발포로 순국하고 김필현 (金弼鉉)이 부상당하였다. 같은 날 화성면에서 산정리 주민들의 시위가 있 었으며, 4월 7일 저녁 8시경에는 와촌리 외 2개 마을 주민 약 150여 명이 만세봉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청남면에서는 4월 7일 밤에 지 곡리의 주민들이 당산에 올라 횃불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충남지방의 3·1운동은 초기 단계에서는 독립선언서나 유인물을 배포하 고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만세운동이 점차 확산되어 참여 군중의 수가 늘어나면서 평화적, 비폭력적 시위에서 점차 무력적, 폭력적인 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