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age

| 9 노성에 파평 윤씨의 종학당(宗學堂)이 있고, 청양에 평택 임씨의 덕명의 숙(德明義塾)이 있다면, 당진에는 의령 남씨의 도호의숙(挑湖義塾)이 있다.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 교육을 중시하여 왔다. 조선시대 중앙에는 성균관 을 두었으며, 지방에는 향교와 서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마을 마다 서당이 있어 일상 생활에 필수적인 한문 교육과 전인교육을 담당하여 왔다. 서당은 19세기말 신교육제도가 보급되면서 약화되어 갔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 시작되자 이를 거부하고 서당으로 전 학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1919년 3·1운동을 목격한 윤봉길 의사가 보통 학교를 자퇴하고 서당에서 민족교육을 받았음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당진 대호지의 도이리에 1860년대 충장공의 후예들인 의령 남씨들이 종 숙(宗塾)으로 세운 도호의숙이 있었다. 충장공 남이흥은 이괄의 난을 진압 한 공신으로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그의 부친인 남유 역시 임진왜란 때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러한 충신들의 후예인 의 령 남씨들이 세운 도호의숙에서 1919년 대호지 만세운동을 주도한 많은 애국지사가 나왔다. 예부터‘충신 집에서 충신난다’는 말이 있듯이, 항일 우국 정신이 대를 이어 전해진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도호의숙과 대호지 3·1운동과의 연관성에 대하여 주목해 왔다. 그러나 도호의숙 설립의 배경과 과정을 비롯하여 도호의숙에서 누가 어떠 한 교육을 시행하였는지 등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또한 도호의숙에서 수학한 학생의 현황과 그들의 활동에 대한 검토도 요구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