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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하 민재봉 남계창 지사 및 이인정 면장 남정 휘 운석 선생과 같이 독립의 기회를 탐색하였다. 백형 상학 지사와 교류가 있는 김좌진 장군과 남상락 지사와 교분이 있는 만해 한용운 및 호남지역 의병부총영사 남정 선생을 통하여 평소 국제정세를 접하였던 바 적도에서 일어난 2.8 독립선언과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제창등으로 국제여론이 아국의 독립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핵심지도부 지사들은 광무황제의 인산참례와 정보모집차 상경하였다가 3.1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하였다. 공과 같이 주도 지사들은 구국의 공생공사할 것을 결의하고 민관이 혼연일체가 되어 기미년 4월 4일 일천여민중을 규합하여 대호지면 사무소 광장과 천의장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활약하다가 왜관헌에게 2백여명이 피체되어 전대미문의 흑두형이란 악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공은 공주와 서대문감옥 등에서 양년 옥고를 치루었다. 기미년 공주감옥에서 김도일 박경옥 이달준 지사가 568월 악형에 못이겨 차례로 옥중 순국하자 왜경은 유달리 공의 입회를 강요하며 병사하였음을 인증하라는 수모를 당하였다. 공은 출옥 후 모진 고문과 악형의 여독으로 여생을 시달리시다 1973년 8월 24일 영민하시니 오호라 삼가 명복을 비오니 공은 가셔도 그 충절의 숨결은 무궁하리라. 광복 40여년에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여 영령을 위로하였다. 배는 성주이씨이니 병신생이요 1971년 5월 25일에 졸하여 묘는 두산리 사곡선영하 걸좌에 걸위합부하다. 공의 문중이야말로 역사에 빛날 충의의 표상이다. 남과 북에서 외침을 죽음으로 막아낸 양세충신의 후손들은 사생취의로 독립운동을 하였던 바 정부는 무려 18명이나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내렸다. 부 성희 지사는 공과 함께 대호지4.4 독립운동 주도 지사로 활약하였으며 백형 상학지사는 백야 김좌진 장군과 같이 군자금 모금과 광복의열투쟁에 가담한 후 왜적의 탐색이 삼엄해지자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