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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청양(淸陽) 출신이다. 그의 부친 동식(東軾)은 시문(詩文)에 뛰어나 향리사람들이 화남선생(華南先生)이라 칭하였다. 뜻이 강개(慷慨)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승순(承順)함에 어김이 없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발하자 이세영(李世永)·이문화(李文和)·이봉학(李鳳學)·이건철(李建哲)·이상천(李相天)·심의승(沈宜承) 등과 함께 여러 번 대궐문밖에 나아가 호소하며 나라를 바로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자 않자 11월 향리로 내려와 안병찬(安炳瓚)의 부친 안창식(安昌植)과 함께 거의할 것을 서약(誓約)하고 민병 180명을 모집하였다. 한편 이봉학은 전 승선(承宣) 김복한(金福漢)을 찾아가 거의할 것을 구체적으로 의논하였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찰사 이승우(李勝宇)의 협조를 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때 대흥(大興)·정산(定山) 등지에서 박창로(朴昌魯)·이세영·이봉학·송병직(宋秉稷)·이상린(李相麟)·이병승(李秉承)·김정하(金正河) 등이 거사계획을 의논해 왔다. 그리고 12월 1일(양력 1896년 1월 5일)을 기하여 청양군수 정인희(鄭寅羲)·전 수사(水使) 조의현(趙儀顯) 등도 군사를 거느리고 홍주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거사계획이 이처럼 구체화되어 가자, 채광묵은 안병찬과 함께 원통한 사정을 하소연한다고 핑계하고 관문으로 들어가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경무관(警務官) 강호선(姜浩善) 등을 체포하고 창의의 깃발을 조양문(朝陽門) 위에 걸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되자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의거에 참여할 것을 허락하고, 스스로 「홍주 목사 겸 창의대장」의 칭호를 써서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웠다. 12월 초3일(양력 1월 17일) 거사의 우두머리로 김복한을 추대하고, 정인희를 선봉장, 이세영을 참모장에 임명하고, 이봉학·이병승 등 주력부대는 공주부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채광묵은 이창서와 함께 남면 소모관으로 파견되고, 상당수의 간부가 소모관으로 각 지방에 파견되었다. 이때 기회주의자 이승우가 이속들의 유혹에 넘어가 태도를 돌변하여, 이튿날 김복한·이 설(李 ) 등을 체포한 연후 의병관계자들을 차례로 구속하였다. 채광묵은 마침 소모차 외지에 나가 있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홍주의진이 모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채광묵은 상경하여 상소하기를 10여 차례 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서 내부 주사(內部主事)를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고 귀향하였다. 이어 1898년에는 송수만(宋秀晩)·김운락(金雲洛)·심선승(沈宣承)·이건석(李建奭)·이문화(李文和)·이세진(李世鎭)·김연식(金璉植) 등과 더불어 을미년의 국모시해 원수를 갚기 위하여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이름을 도약소(都約所)라 하고 돌려가면서 여러 번 상소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그의 처남 이용규(李容珪)·이세영 등과 함께 거사할 것을 상의하였다. 그 운동의 거점을 홍주(洪州)로 결정하고 1906년 5월 11일(음 4월 18일) 홍산 지치(鴻山 支峙)에서 의거의 깃발을 올렸다. 이들이 서천(舒川)·비인(庇仁)·판교(板橋)를 거쳐 남포(藍浦)에 이르렀을 때는 군사의 수효가 1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남포에서는 보령(保寧)의 우국지사 유준근(柳濬根)을 종군시켜 사기를 진작시켰다. 5월 19일(음 4월 26일) 적을 물리치고 홍주(洪州)성에 입성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부서를 재편하였는데, 채광묵은 김광우(金光祐)·조희수와 함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시 물러났던 적이 5월 20일부터 대규모 공격 태세로 나옴에 따라 5월 25일부터 작전 부서를 다음과 같이 일부 개편하여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중 군 장 이세영(李世永) 선 봉 장 정해두(鄭海斗) 참 모 장 김상덕(金商悳) 후 봉 장 박영두(朴永斗) 소 모 장 곽한일(郭漢一) 참 모 윤상봉·채광묵 향 관 민정식(閔廷植) 이상두·유준근 그러나 채광묵은 입성한 이후 득병하여 참전하기 힘든 상태였으나 연일 공방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치병에 힘 쓸 형편이 못되었다. 이에 채광묵의 아들 규대(奎大)는 부친을 쫓아 함께 참전하게 되었다. 드디어 5월 31일(윤 5월 9일) 새벽 3시 적의 대공세가 시작되고 성의 동문이 깨어지자 많은 적이 조수처럼 문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80여명의 의병이 순국하였으며, 유준근을 비롯한 79명의 의사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채광묵 부자는 이 전투에서 성중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다가 불에 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