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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경 당지 군북에 이르런 변상태는 조용태의 집에서 56일을 머물면서 거사의 준비를 다한 뒤에 타군으로 떠났다. 당시 41세였던 공은 친제인 형규와 종형인 주규와 더물어 이의 밀의에 참가하여 태극기의 제작 선언서의 등사 및 이 의 각 리동에 의 배포를 분담 책임졌다. 그 비밀스런 일들이 얼마나 어려웠으랴. 3월 20일은 군북의 장날 이 날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4위의 주민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독립선언문의 낭독식을 가진 군중은 군북 순사주재소를 에워싸고 이를 탈취하려고 조수와도 같이 밀어닥쳤다. 이에 혼비백산한 일경이 발포하니 우리의 의로운 청춘들은 조국의 산하에 그 붉은 피를 송두리채 뿌렸다. 공의 종형 주규는 현장에서 수탄에 숨졌고 공은 관통상을 입었으며 또한 대구감옥에서 2년의 형고를 치루어야 했고 이로 말미암아 5년 후인 1924년 갑자 3월 19일에 유명을 달리 해야만 했다. 친제인 형규는 마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공의 배는 벽진이씨 수기의 여요. 후배는 광주안씨 언찬의 여니 남에 용기 용만 용삼이여 여에 재령인 이현준 이현두 의성인 김창세다. 용기의 자에 선제 옥제 순제요 용만의 자에 균제 광제 태제 병제요. 여에 재령인 이기호 광주인 이상수며 용삼의 자에 원제 의제다. 1일에 공의 남 용삼이 나에게 석배지문을 청하거늘 삼탄하여 이르기를 일문 삼형제가 이룬 충열은 가히 충열의 문에 그 후라 하리라 대저 입석은 선인의 거룩한 뜻을 기려 후세로 하여금 본받게 함에 있나니 조선에 행적이 없음에도 이를 행함은 참뜻이 아니요. 선조의 유덕을 전하지 않음도 또한 인이 아니어든 이제 공의 후예가 공의 거룩한 애국의 뜻을 4천만에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