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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각면각리동을 연락하여 동지규합에 전심하였다. 3월 17.8의 양일간에 걸쳐 공은 동지들과 자택(공의 고는 함안면장이었다.)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선언서를 등사하였다. 약정된 3월 19일 함안 장날 공과 동지들은 일찍부터 군중에게 태극기와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태극대기를 높이 세우고 독립선언식은 엄숙히 거행되었다. 공은 시위행렬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군중을 휘동하였다. 군중은 함안군청에 이르러 군수 민모를 인치하고 행렬에 앞장세워 만세를 부르게 하였으며 순사 파출소와 우체국을 점거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그 함성은 산야에 메아리 쳤고 민족의 기상은 더욱 높았다. 일모에 이르자 마산 주둔의 일 수비대가 도착하여 총검을 겨누고 달려드는데 민족의 기개가 이로써 꺽일 수 있으랴. 맨주먹으로 대항하여 난투는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공은 이날 60여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마산으로 압송되었다. 일인들의 공포와 만행은 거리에서보다 경찰의 고문실에서 행하여졌다. 살과 뼈를 깎는 혹독한 고문에도 공은 결코 꺾이지 않는 지사의 풍모를 보였다. 대구옥에서 3년의 형고를 치루었다. 1927년 10월 16일 안재홍 여운형의참석례에 신간회 함안지회가 결성됨에 공은 이에 가맹하여 민족진영의 결속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25일 졸하다. 배는 함안조씨 문환의 여며 2남 1녀를 두니 남에 기원 기혁이요 여에 김정기다. 기원의 남에 만실이요 그 남에 현규며 기혁의 남에 만영 만성이요 만영의 남에 승훈이다. 아아 기미년의 그날 우리 겨레는 남녀노소없이 모두 일어나 한마음 한 뜻으로 수적의 총검 앞에 부딪혀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