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page


59page

10년 민족적 굴욕의 한일합방을 하게되자 공은 28세의 나이로 비분강개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공은 정의감이 강하고 애국심이 투철하여 일제에 항거할 것을 작심하던 차에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을 계기로 독립만세의 의거를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구국으 일념에 동분서주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3월 10일 함안읍 시일을 택하여 의거하기로 하였다. 당일 오후 2천여의 군중이 모여들어 두손에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에 앞장선 공은 소요죄의 이름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공은 세월을 울분으로 넘기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서는 병으로 몸이 부자유했으나 춤을추며 기뻐했다. 공은 가훈이 엄했고 종사에 성심이 지극하였으니 두곡산당의 중수때에 헌신노력으로 진성하였다. 1953년 8월 26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묘소는 오도봉 선영하 임좌이고 배 파평윤씨는 공과 같은 해에 나서 같은 해 5월 25일 세상을 떠나니 묘는 공과 쌍분이다. 1977년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슬하에 자 찬구 재구 성구 서 김희한 손 병무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