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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천(趙壽千) 공(公)의 휘(諱)는 수천(壽千), 자(字)는 중수(仲叟)이고 호(號)는 복제(北溪)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손자이며 좌윤공(左尹公) 조금호(趙金虎)의 아들로 성종(成宗) 13년 임인(1482)년 함안 원북(咸安 院北)에서 태어나 명종(明宗) 8년 계축(1553)년 3월 25일 돌아가시니 향년 72이다. 연산군(燕山君) 9년 계해(1503)년 22세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연산군(燕山君)의 정치(政治)가 극도로 문란(亂)하였을 때 선전관(宣傳官)의 직책으로 정국계획(靖國計劃)에 참여하여 큰 공(功)을 세워 정국원종일등공신(靖原從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포상(褒賞)으로 부(父)는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증직(贈職)되었다. 중종(中宗)은 공(公)에게 입시(入侍)를 명(命)하고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난리를 당하여 절의(節義)를 지키는 것은 쉬우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부지(扶持)하고 위태(危殆)로움을 구(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로다." 하며 외직(外職)으로 함흥부사(咸興府使)를 제수(除授)하였다. 이어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내직(內職)인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임금을 호위(護衛)하는 시종(侍從)의 반열(班列)에 있으면서 공적(功績)이 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昇進)한 후 43세 때 다시 외직(外職)인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에 제수(除授)되었으며 그 후 경상우수군절도사(慶尙右水軍節度使)로 재직(在職)하였다. 30여 년 동안 봉직(奉職) 후 64세 때 을사사화 (乙巳士禍)가 일어난 것을 보고는 경상우수군절도사(慶尙右水軍節度使) 직(職)을 사임하고 고향(故鄕)에 돌아와 북계(北溪) 위 신동(申洞)에 삼수정(三樹亭)을 지어 노년까지 유유(悠悠)히 자연(自然)을 즐겼다. 용맹(勇猛)과 무예(武藝)가 남보다 뛰어났고 세 임금을 섬기면서 근신(謹愼)하고 사기를 맞춰 사직(辭職)하여 해(害)는 공(公)에게는 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