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page


178page

조붕(趙鵬) 공(公)의 휘(諱)는 붕(鵬)이며 자(字)는 대익(大益)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4세손(世孫)으로 중종(中宗) 갑오(1534)년에 태어나 선조(宣祖) 무술(1598)년에 65세로 전사(戰死)하였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공(公)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과 각별(恪別)한 친분(親分)으로 전략(戰略)을 수시로 논의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亂)시에는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으로 울산성(蔚山城)전투에서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선두(先頭)에서 왜적 (倭敵)을 닥치는 대로 격파 (擊破)하고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은 떨어지고 중과부적 (寡不敵)이라 끝내 적(敵)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공(公)은 조금도 굴복(屈伏)하지 않고 도리어 "이 땅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인데 감(敢)히 도이(島夷) 네 놈들이 침범하다니 내 한 칼로 다 무찌르지 못함이 한(恨)이로다." 라며 적(敵)을 크게 매도(罵倒)하였으며 적(敵)의 항복(降伏) 권유(勸誘)에도 눈을 부릅뜨고는 "내가 예의지국(禮儀之國)에 태어나 어찌 네 놈들에게 구차하게 생명(生令)을 연장(延長) 받고자 하겠는가." 라고 소리치니 적(敵)이 공(公)의 입을 찢었으나 그래도 꾸짖기를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학성(鶴城)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조정(朝廷)에서 공(公)의 장(壯)한 충절(忠節)을 알고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증직(贈職)하고 뒤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가증(加贈)하고 삼종질(三從)인 증(贈) 관서공(判書公) 신도(信道)와 함께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하였다. 삼충사(三忠祠)에 친조카(親姪) 고성공(固城公) 응도(凝道), 도곡공(道谷公) 익도(益道)와 같이 삼숙질(三叔姪)을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178page

조탄(趙坦) 공(公)의 휘(諱)는 탄(坦)이요 자(字)는 극평(克平)이며 호(號)는 도암(韜巖)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4세손(世孫)으로 명종(明宗) 임자(1552)년 8월 4일 함안 검암에서 태어나 8세에 조부 내헌공(耐軒公)에게 소학을 배우고 21세에는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을 종유하여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익혔다. 공의 성품은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며 지절이 뛰어났다. 부모의 상(喪)에는 모두 여막을 짓고 3년간 묘소를 지켰으며 임진왜란때 왜적이 부의 묘를 발굴하여 관곽(棺槨)이 노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공은 함안 옹곡으로 달려가 파헤쳐진 관을 지고 낙동강을 건너 구미 인동(仁同) 천생산성(天生山城) 아래 임시 매장해 두고 가족을 청송(靑松)으로 이주시킨 후 동생 방(垹)과 함께 가동(家僮) 수백인과 수백명의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적과 싸웠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시에는 동생 방(垹), 조카 형도(亨道)와 함께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같이 창녕 화왕산성(火旺山 城)에서 적을 막았다. 선조 36년 계묘(1603)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난(亂)이 평정된 후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알려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을 제수(除授)받았고 곧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만년에 함안의 포덕산(飽德山) 아래 은거하여 자연을 벗 삼다가 광해 임자(1612)년 11월 20일 노환으로 수동(洙東)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1이다. 고종 정묘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178page

조방(趙垹) 공(公)의 휘(諱)는 방(垹)이요 자(字)는 극정(克精), 호(號)는 두암(斗巖)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4세손이다. 명종 12년 정사(1557) 함안 검암에서 태어났다. 황곡 (篁谷) 이칭(李偁) 선생으로부터 수학(受學)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록을 받는 관리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사재를 내어 의병을 일으켜 정암진과 화왕산성에서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적을 막아 큰 공(功) 을 세웠다. 전란(戰亂)이 끝난 후에 공(公)은 자신의 공적(功續)을 내세우지 않고 고향에서 지내니 고을 사람들이 그 충절과 효성에 감복하여 모임을 갖고 장계(狀啓)를 올려서 표창을 받도록 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공(公)은 놀라서 맏아들 위도(衛道)를 보내어 그 문서를 빼앗아 불사르게 하고는 "신하가 나라를 위하고 자식이 부모를 받드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도리다. 표 창이 웬 말이냐. 혹시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공(公)은 할 일을 다 하고도 그 공적(功績)을 내세우지 않았다. 인조 16년 무인년(1638) 돌아가시니 향년 82이다. 공(公)께서는 낙동강 변 두암(斗巖)에 정자(亭子)를 지어 반구정(伴鷗亭)이라 이름 짓고 즐기며 살았다. 이로 인하여 스스로 호(號)를 두암(斗巖)이라 하였다. 선조 40년 정미년(1607) 봄에 공(公)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제현(諸賢)과 중형(仲兄) 식(埴). 조카 임도(任道)와 함께 용화산(龍華山) 아래 낙동강에 배 띄워 강론(講論)한 사실이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에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충효실감(忠孝實鑑)과 가훈팔목장(家訓八目箴)이 있다. 영조 45년 을 축년(1769)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은(李溵)의 장계(狀啓)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