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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忠毅公) 조종도(趙宗道) 공(公)의 휘(諱)는 종도(宗道)요 자호(自號)는 대소헌(大笑軒)이며 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으로 1537년 정유년에 함안 원북에서 태어났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하생이며 1558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뒤 안기도 찰방이 되었다. 이때 이황(李滉) 선생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용인(龍仁)·단성(城) 현감(縣監), 금구(金溝) 현령(縣令)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는 창의(倡義)에 앞장섰으며 촉석루(矗石樓) 삼장사(三壯士)의 한 분이다. 1597년 정유재란에 함양군 수직(咸陽郡守職)에서 물러났음에도 급박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처자와 고을사람들을 거느리고 황석산성에 들어가 안의현감 곽준(郭䞭)과 함께 가토오(加藤清正)가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陷落)되어 순절(殉節)하였다. 부인 전의(全義) 이씨(李氏)는 판서(判書) 이준민(李俊民)의 여식(女息)으로 성(城)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공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 정려(旌閭)를 명하고 충신으로 표창하였다. 부군(夫君)은 충의를 밝히고 부인은 정열(貞烈)을 보전하여 가문을 빛내니 만고의 쌍절(雙節)이라 일컬어 함안(咸安) 원북에 쌍절각(雙節閣)이 건립되어 있다. 산청(山淸) 소남(召南)의 부조묘(不祧廟)에서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를 지내고 있다. 황석산성(山城) 입성(入城) 전에 지은 시(詩)에 공동산(崆峒山) 밖에 사는 것도 오히려 다행이지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처럼 성 안에서 나라위해 죽는 것 또한 명예로운 일이네 [崆峒山外生猶幸 巡遠城中 死亦榮] 하였으니 평소 큰 뜻을 세워 지켜옴이 이와 같았다. 경사(經史)에 밝고 기개가 높고 의리(義理) 정신이 강하며 해학(諧謔)을 즐겼다. 함안(咸安)의 덕암서원(德書巖書院) 함양의 황암사(黃巖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문헌으로 대소헌일고(大笑軒逸稿)가 있고 사적이 삼강행실(三綱行實)과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및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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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남(趙俊男) 공(公)의 휘(諱)는 준남(俊男)이요 자(字)는 사언(士彦)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으로 명종 2년(1547)에 태어났다.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지절(志節)이 있어 구차하게 얻거나 시속을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효행으로 소격서(昭格署) 참봉에 천거(薦擧)되었으나 기쁜 기색이 없어 그 까닭을 물으니 "우리 집안은 대대로 절의를 지켜 청렴하고 검소한 덕으로 살아왔는데, 내가 벼슬에 뜻을 두어 가문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라고 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에 사람들이 피난하면서 옛날 증자(曾子)도 적이 쳐들어오면 난을 피함이 옳다고 한 고사를 들어 함께 갈 것을 권했으나 공은 "내 평소 글을 읽어 임금께 충성하고 부모께 효도함을 알거늘 어찌 처자식의 안전만 꾀하리오." 하며 마을에 남아 선영을 보살폈다. 선조 30년 정유재란에 왜적들이 민가를 약탈하고, 증조부(曾祖父) 집의공(執義公)의 묘를 파헤치자 공은 적의 칼날 속으로 달려 들어가 흙으로 관을 덮으며 온 힘을 다해 막았다. 적들이 포로로 데려가고자 하여 무진정 아래까지 끌려간 공은 "너희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선조의 묘를 훼손한 불공대천의 원수다. 내어 찌 끌려가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리오." 하고는 북향 사배하고 차고 있던 칼로 자문(自刎)하니 향년 51이다. 놀란 적들이 의로운 사람이라며 옷으로 시신을 덮어주고 떠났다. 이후 사람들은 무진정 아래에서 나는 죽순과 나물을 캐 먹지 않는다. 밀암(密菴) 이재(李裁)는 비명(碑銘)에서 "아버지는 효에 순절하고 아들 또 한 충에 순절하였다. 누가 근원을 열었나. 빛나는 어계(漁溪) 옹(翁)이라네." 라고 하였다. 숙종 32년 나라에서 아들 조계선(趙繼先)과 더불어 부자정려(父子旌閭)를 내려 무진정 경내에 부자쌍절각을 세웠다. 철종 5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고 고종 5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가증(加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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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도(趙信道) 공(公)의 휘(諱)는 신도(信道)요 자(字)는 중유(仲由)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世孫)으로 명종(明宗) 갑인(1554)년에 태어났다. 공(公)의 성품(性品)은 강직 (强直)하고 지기(志氣)가 탁월(越)하였다. 일찍부터 한(漢)의 마원(馬援) 장군의 전기를 읽은 후에 말가죽에 시신(屍身)을 싸서 돌아옴이 참다운 대장부라 하더니 무관직(武官職)을 택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온양군수를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선조(宣祖)가 피난길에 올 랐을 때 공은 왕(王)을 의주까지 안전하게 호위(扈衛)하여 공을 세웠다. 퇴각(退却)했던 왜적(倭賊)이 다시 공격하였을 때 공(公)은 한강(漢江)에서 적을 맞아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기력도 다하여 열 손가락이 다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공(公)은 물러나지 않고 준열(峻烈)하게 적을 크게 꾸짖다가 끝내 전사하 고 말았다. 선조(宣祖)가 이 소식을 듣고 애석해 마지않으며 "내가 그런 위험한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장군 덕분이었다.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이 항우(項羽)의 군사에 포위되어 위급했을 때 자기 몸을 희생하여 고조(高祖)를 구출한 장군인들 공(功)이 이보다 크겠느냐." 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였다. 조정에서 호성원종일등훈(扈聖原從一等勳)과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훈(錄勳)하였다. 공(公)은 자식을 두지 못하여 유해(遺骸)를 아무도 수습하지 못하였다. 난(亂)이 평정된 뒤 선산(先山) 아래 초혼장(招魂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