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page


176page

조민도(趙敏道) 공(公)의 휘(諱)는 민도(敏道)요 자(字)는 계유(季由)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世孫)으로 명종(明宗) 병진(1556)년에 태어났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자 공(公)은 처자(妻子)를 장인(丈人)인 직장(直長) 유인흡(尹仁洽)에게 맡기고 결별을 고하며 나라 형편이 이리 어지러우니 한 자루 칼을 들고 싸움터에 나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옳은 일인 즉 살아 돌아옴을 기약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잘라 부인에게 주면서 내 죽거든 이것으로 선산(先山) 아래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공(公)은 가족과 헤어져 순변사(巡邊使) 이일(李盤) 진중(陣中)에 나아가 전투에 참가하였다. 상주(尙州)에서 싸울 때 군사들은 지치고 원조마저 끊겨 도망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분격(奮澈)하여 나라의 위난(危難)을 보고도 도망함은 신하(臣下)의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이 사실을 장계(狀啓)로 올리니 선조(宣祖)가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증직(贈職)하였고, 조세감면(租稅減免)의 특전을 주었다. 공(公)이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겨우 일곱 살로 아무도 그 유해를 거두지 못하였다. 부득이 출정(出征) 전에 남긴 머리카락으로 선산 아래 장사지냈다. 공(公)의 평소 기지(氣志)와 절의(節義)는 시성(詩性)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공(公)이 지은 많은 시(詩) 두루마리와 집안에서의 효행이나 이웃 간의 선행 등을 기록한 것들이 난리에 불타 없어졌다.
176page

조응도(趙凝道) 공(公)의 휘(諱)는 응도(凝道)요 자(字)는 사성(士成), 호(號)는 송오(松塢)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으로 명종 을축(1565)년에 태어나 선조 정유(1597)년에 왜군과 전투 중 순국(殉國)하니 향년 33이다. 19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재직(職)하였다. 공(公)은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렬하여 응전 태세를 강화하였다. 그해 6월의 당포와 당항포 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도와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며 10월의 진주성 전투에서 복병장(伏兵將) 정유경(鄭惟敬)과 함께 군병 오백명을 이끌고 많은 횃불을 밝혀 함성을 질러 원군(援軍)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여 성을 포위한 적군을 퇴각시켰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료로서 전략을 논의하였고, 충무공(忠武公)이 시관(試官)이었던 무과별시(武科別試)에서는 참시관(參誠官)으로 참여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왜군 침입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잠시 피신하기를 권하였으나 공(公)은 "왕명을 받아 국토를 지키는 신하가 어찌 피신을 도모하리요. 차라리 이 땅에서 죽을지언정 불충은 행하지 아니하리라." 하며 크게 노하였다. 운정(雲汀) 박애상(朴愛祥)공과 귤도(橘島) 앞 해전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조정에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훈(錄勳)하고, 통훈대부 병조참의(通訓大夫 兵曹參議)로 증직(贈職)하였다.
176page

조형도(趙亨道) 공(公)의 휘(諱)는 형도(道)이며 자(字)는 경달(景達), 호(號)는 동계(東溪)이다. 생육신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 손으로 명종 22(1567)년 청송(靑松) 안덕(德)에서 망운정공(望雲亭公)의 차자로 태어나 백부 검암공(劒巖公)에게 입양되었다. 1583년 첨지 민추(閔樞)에게 수학하고, 1587년 함안으로 귀성(歸省)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사사한 뒤 3년간 향시(鄕試)에 이어 장원하였다. 임진왜란에 공은 27세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의병을 모집함에 공(公) 역시 의병을 일으켜 정암진(鼎巖津) 전투에 서 큰 전공을 세웠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비국랑을 겸직하였다. 1595년 겨울에 경산현령이 되었으며, 정유재란에는 팔공산(八公山) 회맹(會盟)에 참여하고 화왕산에 입성하여 전공을 세웠다. 1606년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재임하였고, 1617년 본도 토포사(討捕使)로 영천옥에서 탈옥한 죄인 이경기(李景 祺)의 도당을 추포하는데 많은 공을 세워 1622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차하였다. 1623년 3월에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공로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부원수(副元帥). 보성군수(寶城郡守)에 배명(拜命)되었다. 1627년에 공이 본도 호소사(號召史) 장현광(張顯光)의 중군이 되었으며, 그 공로로 진주(晉州)·상주영장(尙州營將)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어 괴산군수(槐山郡守)로 부임하였다. 1629년 경주영장(慶州營將)으로 3년간 재직하였다. 1636년에 청(淸)나라 대군이 서울로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하여 전장으로 달려갈 행장을 최촉(催促)하고 관찰사 심연(沈演)의 충원(忠原) 진영으로 달려갔다. 이때 심연(沈演)이 목계에서 두류(逗留)하면서 진격하지 않거늘 공이 분을 참지 못하고 선봉을 맡겨 주기를 청하였으나 공의 노쇠(老衰)함을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적과 강화(講和)를 논의(論議)한다는 말을 듣고 우국통분(憂國痛憤)하다가 1637년 2월 8일 돌아가시니 향년 7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