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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도(趙益道) 공(公)의 휘(諱)는 익도(道)요 자(字)는 여행(汝行). 호(號)는 도곡(道谷)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公節) 조려(趙旅)의 5세손(世孫)으로 선조 을해(1575)년에 태어나 계유(160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이르렀고 인조 정해(1647)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73이었다. 공(公)이 선전관(宣傳官)이던 갑자(1624)년에 이괄(李道)이 평소 두려워하던 공(公)을 출장 보내고 난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공(公)은 왕(王)이 피난해 있던 공주로 가서 손가락을 깨물어 역적 토벌을 청하는 혈서를 올리니 왕께서 원수(元帥) 진중에 전속 명령을 내렸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우니 왕이 "난에 임하여 한 번의 죽음은 쉽지만 거취를 분명하게 함은 어려운 것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쓴 충성은 송(宋)나라 악비(岳飛)의 등에 새긴 충절과 같다." 라고 하며 악무목(岳武穆)의 정충록(精忠錄)을 하사(下賜)하고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였다. 그 후 기축(1769)년에 영조에서 악왕정충록(岳王精忠錄)을 찾았으나 인조의 하사품인 정충록(精忠錄)을 유일하게 공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어 이를 장계와 함께 올리니 영조에서 교서관(校書館)에 새로이 간행할 것을 명하고 서문에 이르기를 “정충록(精忠錄)을 보니 옛적에 충성을 표창한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있으니 지금 어찌 다른 은전(恩典)이 없을쏘냐! 선전관(宣傳 官) 조익도(趙益道)를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하고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학문에 능한 자는 이조(吏曹)에 명하여 문관(文官)으로 임용하며 무(武)에 능하면 병조(兵曹)에 명하여 무관(武官)으로 등용하되 이 일 등은 치레로만 그치는 사례가 많으니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단단히 명하여 즉시 그 성명을 물어 임용토록 할지니라." 라고 하였고 덧붙여 전교(傳敎) 를 내렸다. 이와 같은 왕(王)의 전교(傳敎)로 공(公)의 충성함이 세상에 알려지니 세상 사람들이 조선의 악비(岳飛)라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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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趙善道) 공(公)의 휘(諱)는 선도(善道)요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묵곡(黙谷)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世孫)으로 선조(宣祖) 경진(1580)년에 태어나 인조(仁祖) 경진(1640)년에 돌아가셨다. 광해군(光海君) 무오(1518)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 어모부장(禦侮部將)에 이르렀다. 인조 갑자(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무관으로 안현(鞍峴) 전투에 참전(參戰)하였다. 마침 이괄(李适)이 직접 지휘하는 군사들이 기세등등하게 공격해 오니 공(公)은 주장(主將)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眞言)하였다. "저 역도(逆徒)들은 광폭한 힘만 믿고 있을 뿐 군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수는 교만(驕慢)하고 군졸은 나태(懶怠)하니 반드시 전복(顚覆)될 것입니다." 하며 피곤해 있는 이괄(李适)을 칠 것을 주장하여 즉각 공격(攻擊)을 명령하고 몸을 날려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군사들도 공(公)의 뒤를 따르며 일당백(一當百)의 용맹(勇猛)으로 적을 섬멸(殲滅)하여 나라에 큰 공(功)을 세웠다. 조정에서 선고(先考)를 판결사(判決事)로, 선비(先妣)를 숙부인(淑夫人)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진무원종일등훈(振武原從一等勳)에 족형(族兄) 참의공(參議公) 익도(益道)와 함께 녹훈(錄勳)하였다. 사적(事蹟)이 진주지(晋州誌)에 실려 있다. 공이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산청(山淸) 묵곡(黙谷)으로 귀향(歸歸)하여 시(詩)를 짓고 지내며 여생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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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선(趙繼先) 공(公)의 휘(諱)는 계선(繼先)이요 자(字)는 효백(孝伯)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6세손이고 집의공(執義公) 휘 삼(參)의 현손이며 승지공(承旨公) 휘 준남(俊男)의 아들로 선조 3년(1570)에 출생하였다. 공(公)은 지용(智勇)이 뛰어나고 풍모가 장대하였다. 궁마(弓馬)를 익혀 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하여 인조 1년(1623) 관로에 나가 선전관에 제수되었 다. 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중군(中軍) 구성(龜城) 부사 이윤서(李胤緖)는 공의 처남이었다. 원수 장만(張曉)은 조정에 청하여 공을 보내어 이윤서의 귀순을 도모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병 삼천을 이끌고 원수의 진으로 돌아온 이공은 끝내 자결하였고, 그 시신을 수습하여 복명한 공은 기일이 늦었음을 탄핵받아 유배 후 이듬해에 풀려났다. 인조 3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선천(宣川)으로 진을 옮기자 조정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완(李莞)을 의주부윤에 임명해 방어하게 하였다. 이완은 조정에 청하여 공을 막료(막僚)로 불러 군기를 관장하게 하고 군무(軍務)를 의논하였다. 인조 5년(정묘 1627) 정월 13일 후금군(後金軍)이 의주를 침공하여 14일 날이 밝자 많은 적이 성을 넘어 들어와 격전의 함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공은 변방의 수재(守宰) 장수(將帥)들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선봉에서 분격하여 적을 무수히 사살하였으나 화살은 다하고 성은 함락되어 장렬히 순국하니 향년 58이다. 공의 충노(忠奴) 대갑(大甲)이 의주에서 달려와 집에 이 사실을 고한 뒤 앞 소(沼)에 몸을 던지니, 이에 공이 남긴 의발(衣髮)을 수습하여 함안 법수 두배 뒷산에 예장(禮葬)하고 그 묘소 아래에 대갑을 묻었다. 밀암(密庵) 이재(李裁)의 비명(碑銘)에서 "한 집안에 100년을 전후하여 어계(漁溪)의 청풍 고절 5세손의 효행 순절 6세손의 충의 순국 삼절이 모였으니 그 미덕 위대 하도다.”라고 하였다. 숙종 32년 나라에서 부자정려(父子旌閭)를 내렸다. 칠종 5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고, 고종 5년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훈련원도정(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訓練院都正)에 증직(贈職)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