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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 조진규 선생의 초휘는 한규 자는 국필 호는 퇴우이시다. 경술년 국치 후 9년 을미 3월에 이희석 공과 더불어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함안시중에 뿌리니 나이 겨우 16이었다. 선생은 범을 잡으려면 바로 그 굴 속에 뛰어들어야한다고 말하시고 언론계에 투신한 후 비밀리에 국내외 동지를 규합하여 갑자년에 청년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벌였고 병인년 6.10만세때 구금되었다. 정묘년에 상해독입당에서 공을 경남대표로 선정하매 곧 상경하여 홍명희 안재홍 공과 더불어 시사를 강론하다가 구속되었으며 같은 해 조한휘 이석건 공과 함께 신간회 함안지회를 결성하고 또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피검되었다. 신미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입당에 입당하여 을해년에 라진 웅기 등지에서 노동쟁의를 주도하다가 신경감옥에 구금되었다. 이때 20년동안 한일이 무엇인가. 허리에 찬 칼과 거문고가 빛날 뿐이로다. 금수강산 탈없이 있으니 언젠가 맑은 하늘에 아침해 솟으리라'고 시를 읊었다. 석방되어 귀국하였으나 옥고와 울분이 병이 되어 신사년 윤 6월 18일에 별세하시니 갑진년 9월 15일생이라. 향년 겨우 38이었고 장지는 칠원 무릉선영 아래 임좌의 원이다. 오호라. 선생의 생의 선세에 정절공 어계 선생 여는 단종 조 생육신의 한 분이요. 두암 선생 방은 임진 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공훈을 세웠으니 공의 충의의 지조는 선세에서 이어받은 것이로다. 선생이 하세한지 4년 후 을유년에 조국이 광복되었는데 그후 36년이 지났도다. 이제 고을 사림이 추모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하고 선생의 고리 괴항에 비석을 세워 그 사적을 기리고자 하여 대표 안창준씨가 선생의 아들 용태와 함께 그 종인 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