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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8일과 23일 두차례에 걸쳐 읍내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일경의 칼을 맞아 순국하였다. 안동 읍내의 의거는 기독교 계통과 천도교 계통의 두 갈래로 각기 계획되어지다가 추진과정에서 서로 긴밀히 연락하면서 합동시위의 형태로 일어났다. 이들은 읍내 장날인 3월 18일 오전 11시를 기해 거사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각기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그리하여 황영남은 거사 당일에 유동봉·송기식(宋基植)·송장식(宋章植)·권중호(權重浩)·이종록(李鍾祿) 등과 함께 태극기와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1백 5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경은 총검으로 탄압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는데, 만세시위의 불길은 오후 6시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났고, 오후 12시경에는 3천여 명의 군중이 시내 각처에서 모여들면서 군청과 경찰서 등 일제 기관을 포위하며 만세시위를 거세게 전개하였다. 이렇듯 고조된 만세운동의 분위기는 일군경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다음 장날인 3월 23일에 이르러 더욱 기세를 올렸다. 오후 7시를 기해 일어난 시위행렬은 3천여 명을 넘었으며 일군경의 총격에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지방법원 안동지청을 에워싸고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 때 황영남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군경에 대항하다가 일경이 휘두르는 칼에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중상을 입은지 이틀만인 3월 25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후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