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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돈(권오상)은 1924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화요계 청년운동단체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에 가입하며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하고, 권오설(權五卨)의 지도 아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와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 후 학생운동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융희황제가 승하하고 권오설과 연결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6·10만세운동을 추진하였을 때, 권오설의 종제(從弟)이기도 한 그는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포섭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탄로나면서 권오설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 학생조직의 계획은 발각되지 않아 권오돈 등은 계획대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원래 태극기와 격문 등은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측에서 준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전 발각되어 모두 압수된 상태에서 이들은 급히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기 등을 제작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 국장일(國葬日)에 권오돈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28년 2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8년 5월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끝내 고문의 여독으로 동년 6월 3일 숨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