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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08년 이강년(李康 ) 의병장의 의진에 참가하여 김현동(金賢東)과 함께 적정(敵情) 탐지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1911년에는 김상태(金尙台) 의진(義陣)에 참가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는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해 도만(渡滿)한 독립운동자들과 연결되어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가,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세 번이나 피체되어 고초를 치렀다. 그럼에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오히려 독립운동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3·1운동 이후 조직된 의용단(義勇團)에 가입하여 경북 지단(支團)의 서기(書記)로 활약하였다. 의용단은 김찬규(金燦奎) 등이 만주 길림(吉林)의 군정서(軍政署)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결성된 독립군 지원단체였다. 주로 경상북도와 남도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용단은 경북 안동을 비롯하여 영천(永川)·군위(軍威)·영일(迎日)과 경남 창녕(昌寧)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들은 독립운동자금요구서 및 시국에 대한 경고문, 길림군정서 발행의 사형 선고서와 같은 문서들을 각처의 부호들에 우편으로 우송하였으나 친일부호들의 외면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일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22년 12월 28일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