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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배후조사에 착수하자 노령으로 망명하셨다. 당시의 미개한 교통과 미편한 통신을 생각하면 일신을 국란에 바친 선각이 아니고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북만산천에서 풍찬노숙형극의 망명생활을 하시면서도 연구를 계속해서 말년통사와 강역고 그리고 자서전 5권을 저술하여 후진들의 올바른 사견과 민족의식을 기르는데 애쓰셨다. 오늘 국토의 분단으로 전하지 아니하니 유감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북만에서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일군에 저항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국내에서 망명 온 많은 청년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노령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일군은 우리 독립군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포위섬멸하려했다. 1920년 김좌진 장군 수석고문으로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유리한 지형을 이용 잠복해서 일군 수천명을 섬멸했으니 항일독립전사에 기리 남을 전과를 올리셨다. 1925년 김좌진 김혁 조성환 이범윤 현천묵 나중소등 혁명가들과 명실공히 우리의 독립정부인 신민부를 창립할 때 선생께서는 강도 일본군국주의는 강적이니 일본과 싸워 이기자면 파벌과 지위를 초월하고 정치이념의 급진과 보수를 극복해야 함을 강조하셨으니 탁월한 애국적 경세가가 아니고는 갖기 어려운 탁견이 아닐 수 없다. 1930년 간악한 일경 송도 경부의 앞잡이였던 박상실에게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고 1931년 괴뢰 만주국이 건국되고 1932년 음 9월 28일 일제의 억압과 박해가 극에 달햇을 때 오매불망 염원하시던 조국의 독립을 못보시고 이역만리 북만에서 내가 죽드라도 강도 일본이 있는 동안은 나의 유해를 본국으로 옮기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64세로 서거하였으니 진실로 머리 숙여 받들어야 할 귀한 유언을 우리들에게 남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