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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결사적 각오로 애국동지와 광복운동을 하니 일경의 박해는 날이 갈수록 심하여 서삼동에 이거하다. 때마침 우리 겨레가 민족자결주의로 3.1운동이 봉기되자 공은 독립선언문을 입수하여 예안 녹전 각동에 용솟음치는 애국청년들과 밀약하고 1919년 3월 22일 예안장날 운집한 군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휘날리는 태극기는 창공을 뒤덮었으며 우렁찬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 찰나 악랄한 왜경과 헌병이 총검을 휘두름에 동지들과 공이 피체되어 안동과 대구 양형무소에서 예심 복심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고문에도 백절불굴의 기백으로 자주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으나 10월형을 선고받고 고양형무소에서 영어의 몸으로 지내다가 출옥 후 벽사동에서 식민지 정치를 사사건건 반대하니 요친찰인으로 처절한 고초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초지일관한 공은 경사와 서예를 계도하여 많은 후진을 배출시켰다. 광복후 고양법곶리에 이주 중 1952년 임진 4월 4일 71세를 일기로 조국통일을 못 본체 영면하다. 묘벽사동 앞 산을좌이며 배 기계 유씨 묘 평사면 오운장등양좌이다. 공이 서거한 지 삼십 유사에 묘도의물이 미구되어 이제 손 태구와 문인 권룡달 독립지사 안동 기념사업회 김을동 동지가 3.1운동사 판결문 및 임찬일의 석언 유계 서문과 강신중이 지은 공적서를 가지고 비문을 청하므로 이렇게 엉성하게 지으나 공의 자주독립정신을 흐리게 할까 두려울 뿐이다. 비명을 쓰니 바다가 끓는 듯 산이 무너지는 듯 그 날의 함성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6대주를 울렸도다. 피흘려 찾은 조국자유여 창달하라. 불의와 타협없는 선비의 정신문화 꽃 향기롭게 길이 빛나리라. 동포여 이 땅을 지키소서.지사여 편히 잠드소서. 자 성덕 성복 서 용궁 전치득 김해 김덕암이며 석언 계원 일동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