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page


37page

1월 집을 떠나 안동 영양 봉화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융희 2년 7월 안동군 내용 담사 부근에서 일제 수비대와 교전 공을 세웠고 융희 3년 6월 의병대장 박처사 등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관이 주재하고 있는 안동 영양군 내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10월 교친 소상때 귀가하였다가 일본관헌에게 체포되어 대구지방재판소로 송치되었는데 이듬해 1월 27일 3년 징역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동안 옥고를 치르고 출옥 고향으로 환고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는데 몇년동안 외처로 피신하였기 때문에 재수감은 면하였고 가족과 집안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출생한 독자 중대는 중환을 앓았으며 가세가 기울어져 심한 생활고의 참상을 겪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광복을 맞이하기 6개월전인 3월 24일 향리 대곡에서 서거하였으니 향년 75세였다. 두품산에 장사하였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고 1993년 6월 1일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증을 받았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성격이 원만하여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었으므로 모두가 좋아하고 잘 따랐으며 문중이나 이웃 일에는 남보다 먼저 나서서 처리하였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침착하고 신중히 대처하여 실수가 없었으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곤궁한 생활 중에도 함께 항일투쟁을 하다가 순국한 박처사의 가족들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