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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늙은 이 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 왔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펴는 도중 굽힘 있고, 굽히는 중에도 펴는 것이. 태악(泰岳)도 홍모(鴻毛)도 다 같은 이 티끌이라오. 밝고 밝은 이 마음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 천일(天日)을 돌리는 그 일인들 어찌될 수 없으리. 이 시에서 김도화의 생사를 초월한 구국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수령들 중에서 일본의 편에 섰다고 인정되는 예천(醴泉)군수 유인형(柳仁馨)·의성(義城)군수 이관영(李觀永)·영덕(盈德)군수 정재관(鄭在寬) 등을 참형에 처하였다. 이어서 인근의 의진들이 군사적으로 연합하여 상주(尙州)에 있는 적의 병참(兵站)을 공격하였다. 3월 그믐에 함창 태봉(咸昌 胎峰)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3월 26일 제1차 공격을 하였고, 29일(음 2월 16일) 연합 의진의 의병들이 모두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4월 2일 적군 50여명이 안동부로 들어가 시가에 불을 질렀다. 이때 안동읍 천여 호의 민가가 불탔다. 이것은 의병 전투사상 가장 큰 피해였다. 태봉 전투에서 실패한 후 안동부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의병장들은 다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안동 의진은 대장 김도화를 중심으로 하여 부장(副將) 유난영·도총 김하휴(都總 金夏休)·선봉장 유시연(柳時淵)·소모장 이충언(李忠彦) 등이 활발하게 움직여서 많은 병력을 보충하여 안동읍을 중심으로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안동 의진이 활발해지자, 영양(英陽)의 김도현(金道鉉)·진보(眞 )의 허 훈(許薰)·의성(義城)의 김상종(金象鍾) 및 선성(宣城)의 이인화(李仁和)의 의진들이 서로 호응하여 연락을 취하니 형세가 다시 크게 떨쳤다. 이후 고령으로 계속 활동은 못하였으나 소(疏)와 격문(檄文) 등으로 구국일념의 뜻을 불살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