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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조는 감역 노강 휘 민익이고 고는 거사 포헌 원재이며 비는 안동김씨로 참봉 언근의 따님이다. 부군은 고종 경오(庚午)(1870)년 2월 21일 출생하니 천용(天容)이 준일(俊逸)하고 천성이 인후(仁厚)하며 재품(才稟)이 영특(英特)하여 일찍부터 독서와 시문에 능하였고 천민(賤民)이나 유걸(流乞)에 대한 긍휼지심(矜恤之心)이 지극하여 면대(面對)하게 되면 빈객(賓客)으로 융우(隆遇)하여 그 덕행을 흠앙(欽仰)하는 송덕비가 전국 도처에 건립되었으며 모부인(母夫人) 상사(喪事) 시에는 東國安女宗徽菴 李參奉 大夫人 喪禮(동국안여종휘암 이참봉 대부인 상례)라는 銘旌(명정)에 전국 유걸(流乞) 대표 이원보 서기 강문봉(康文峯) 근정(謹呈)이라 기록(記錄) 화환(花環) 등과 함께 각도 대표 유걸(流乞)이 함께 조상(弔喪)하였다. 수학(修學)하던 당시의 국내 정세는 왜적의 침략 흉계가 날로 심하고 친일 역당(逆黨)이 왜호(倭好)가 되어 마침내 국권 약탈(掠奪)을 노골화(露骨化)함에 시세(時勢)에 부앙(俯仰)치 않는 학문을 의연(毅然)히 중단하고 의암 유인석 의진에 종사(從事)로 부진(赴陳)하여 사재(私財) 헌납(獻納) 의병 모병 등 군무 전반에 걸처 고심하며 혈성(血誠)을 다하였으며 정미(1907)년 운강 이강년 선생이 재의거함에 다시 종사(從事)로 부찬책(赴贊策)하는 등 장장 15년 여에 걸처 진충갈력(盡忠竭力) 충의(忠義)를 다하였다. 배 연일정씨는 해만의 따님으로 2녀를 두었으니 이은만 홍원표에 출가하였고 계배 고령박씨는 주응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낳으니 남은 구영 칠영이고 녀는 김 시중에 출가하였으며 손자 봉훈 범훈을 두었고 손녀는 이인성 조희구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병술년 5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