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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사 청일전쟁후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개화를 빙자하여 단발까지 강요하였다. 이 때 제천의 장담 마을에 모여 공부하던 선비들은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닥쳤음을 알고 의병항쟁의 길에 나선다. 제천의병은 을미년 말(1896년 1월)에 봉기하였다. 처음에는 지평(양평)의 포수부대가 중심이었지만, 결국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장담의 선비들이 의진을 이끌게 되면서 '호좌의진'으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친일적인 지방관료들을 처단하며 한 때 충주성까지 장악한 제천의병은 전국의 의병을 선도하고 전기의병(을미의병)의 상징이 되었다. 주변의 여러 고을을 장악하고 가흥과 수안보 등의 일본군 병참을 끊임없이 공격하였으며, 충남과 영남 쪽까지 나아가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그들의 투쟁은 아관파천후에 내려진 해산명령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근거지인 제천을 빼앗긴 후에는 양서지방으로 옮기면서까지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은 압록강을 넘어서고야 말았다. 망명 후 의병은 일단 해산되었지만, 그 후에는 유인석을 중심으로 해외에 무장항쟁의 의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후, 일본의 군사적 강점과 국권침탈이 강화되자 1905년에 주천과 단양에서 원용팔과 정운경이 봉기하여 제천의병이 다시 전국의 의병항쟁을 이끌었다.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여름에는 이강년이 다시 봉기했다. 호좌의진을 계승한 그는 소백산 일대에서 전개된 일본군경들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고, 한 때는 경기도 가평지역까지 진출하여 서울 입성을 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강년이 희생된 후로는 김상태 등이 한일합병 이후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이처럼 제천의병은 한말의 대표적 의병부대로서 여러 차례의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매번 선도하였고, 가장 오랫동안 저항하였으며, 해외에서 전개된 독립전쟁노선의 선구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