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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堤川) 사람이다.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진에서 활동하였으며, 1907년 이후에는 이강년(李康 ) 의진에서 사서(司書)로 활약하였다. 강순희는 일제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단행할 때 국권상실의 위기의식을 절감하고 분연히 궐기하여 유인석과 제천에서 기의하였다. 그 후 그는 유인석 의진을 따라 종군하다가 을미의병이 종결되자 집으로 돌아와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향리에서 은인자중하며 정세를 관망하고 있던 그는 일제가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보고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5년 9월 정운경(鄭雲慶) 의진에 참가하였다. 정운경 의진은 단양·제천·영춘·청풍의 4개 군 일대에서 3∼4백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고, 인근 각지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전투태세가 정비되기 전에 원주진위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정운경 의병장이 피체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강순희는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을 모색하던 중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丁未7條約)」이 체결되면서 군대가 강제로 해산됨에 따라 의병전쟁은 한층 더 확대되었다. 군대가 해산되자 군인들은 해산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격렬한 시가전을 감행하였고, 지방에서도 군인들이 잇달아 봉기하여 의병에 합류하거나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국망사태에서 이강년이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자, 그는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여 문필(文筆)에 관한 일을 맡았다. 이후로 그는 이강년 의진과 함께 종군하면서 문사에 관한 모든 일을 담당하는 한편 전투에 참여하고 보고들은 바를 적어 두었다. 이것이 후에 이강년 의병장의 창의록인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을 저술 편집하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