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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항상 조국 광복의 염원을 품고 동지들과 그 방안을 상의하였다. 1916년 채기중(蔡基中)·박상진(朴尙鎭)·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1917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8년 1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었다. 1924년 8년형으로 감형됨에 따라 출옥하였으나 그의 의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출옥후 만주 길림(吉林)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였으며, 신현규(申鉉圭)·이병묵(李丙默) 등과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6년 6월경부터 경남지방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5천여원의 군자금을 신민부에 전달하였으며, 일본인으로부터 현금 5백원, 엽총 2정 등을 빼앗아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지 윤치백(尹致伯)·김보연 등이 만주로 복귀하기 위하여 들어가던 도중 밀정 서(徐)모라는 자의 밀고로 체포됨에 따라, 손봉현(孫鳳鉉)·신현규(申鉉圭)·신양춘(申陽春)·윤창선(尹昌善) 등의 동지가 모두 체포되었다. 그도 서울 태평로에 있던 삼통여관(三通旅?)에서 동지들과 함께 1928년 7월 30일 체포되었으며, 신현규·신양춘의 두 동지는 일경의 악랄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동년 8월에 재판도 받지 못하고 변사(變死)하였다. 그는 결국 1929년 9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동년 12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2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10여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40년 말에 중병으로 가석방되었으나 10여일만에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