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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현풍(玄風) 사람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최초의 봉기를 이끈 의병장이다. 1895년 2월 공주부(公州府) 영장(營將)에 재직하면서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낼 것을 계획하고 관병 400여 명을 훈련시키다가 피체되어 4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년 음력 9월 18일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에 항거하여 충남 대덕군(大德郡) 유성(儒城)에서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기의(起義), 회덕(懷德)으로 진군하여 군사를 모은 후 그곳 관아(官衙)를 습격하였다. 무장을 갖추고 진용을 정비하면서, 선봉장(先鋒將)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장(中軍將)에 오형덕(吳亨德)을 임명하여 진산(鎭山)을 거쳐 공주(公州)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음력 10월 28일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하여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중군장 오형덕 등과 함께 경북 고령(高靈), 초계(草溪)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이에 감역(監役) 윤희순(尹羲淳)은 군자금의 지원을 약속하고 초계군수(草溪郡守)는 신변보호에 나서는 등 재봉기의 준비는 무르익어 갔으나 아쉽게도 거의 직전에 피체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구부(大邱府)에 압송된 그는 심문하는 관찰사를 논박하며 거의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등 뜻을 굽히지 않았다. 1896년 봄 오형덕과 함께 파옥(破獄), 탈출하여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도지휘(都指揮)로서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띄우고 제천의진(堤川義陣)의 유인석(柳麟錫) 의병장과 연계하여 의병 구국투쟁을 모색하는 등 재거의(再擧義)를 계획하던 중 병을 얻어 46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최초로 거의한 그의 봉기는 의병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자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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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山 文錫鳳(의산 문석봉)